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카레의 역사

by 팔딴 2023. 6. 9.

1935년 동아일보 지면에 연재되었던 소설 《상록수》 여기엔 좀 이상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오케스트라 음악을 반주 삼아 라이스카레 같은 양식을 즐겼다는 조선인들 식사 준비가 길어지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별식을 한다고 저녁을 굶길 작정이야?'. 우리에게 카레는 무엇보다 일본 음식이고 생각을 좀 더 해보면 인도 음식이잖아요. 집에서 간편하게 해 먹을 수 있으니까 특별한 날 먹는 음식의 느낌도 덜하고요. 그런데 왜 100년 전 카레는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서양음식 대접을 받았던 걸까요?

 

1. 문명의 교차로

인류의 초기 도시들이 탄생한 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과 나일 강 일대였습니다. 각각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입니다. 그리고 4500년 전에는 이곳 인더스 강 주변에서도 문명이 태동했는데요. 인더스 문명이라고 합니다. 인더스인들은 인접한 메소포타미아와 긴밀하게 교류했고 따라서 한때는 인더스인들이 밀이나 보리에 의존해서만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꽤 다양한 식단을 구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갠지스 강이나 양쯔강, 황허 강에서 작물화된 쌀이나 기장 같은 곡물들 그리고 인도 남부에서 생산된 생강이나 강황 같은 향신료의 잔해도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곡물과 향신료 들은 오늘날 카레라고 불리는 음식을 만드는 주 요소지만 인더스 문명에 벌써 초기 형태의 카레가 존재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사이의 평원이 오래전부터 여러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했고 이것이 카레의 탄생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했던 아리아인은 약 4천 년 전 이란 고원을 거쳐 인도-갠지스 평원으로 이주했고 이를 계기로 이들이 소비했던 다양한 유제품들 정제버터나 요구르트 등이 인도 문화로 들어왔습니다. 약 3천 년 전부터는 바닷길을 통한 교역이 활발해졌는데요. 말루쿠 제도에서 육두구와 정향이 동지중해 연안에서 고수와 커민이 수입되었고 여기에 인도 남부에서 생산된 후추나 계피, 카르다몸 등이 더해지며 인도는 말 그대로 향신료의 왕국이 되어갔습니다. 그런가 하면 8세기부터는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아바스 칼리파국은 이란고원과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하며 인도-갠지스 평원에 점점 다가섰고 13세기 중엽에는 델리 술탄국이 아예 이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죠. 이슬람의 접근은 채식주의 문화가 강했던 인도에 이슬람의 고기 요리들이 전해지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처럼 여러 문화의 교차 속에서 인도인들은 다종다양한 스튜 요리들을 개발해 나갔습니다.

왼쪽부터 고기스튜 쿠람부, 맑은 국물의 라삼, 요거트를 넣은 코르, 채소로 만든 삼바르

채소스튜인 삼바르도 있었지만 고기스튜 또는 생선스튜인 쿠람부도 있었고 라 삼처럼 국물이 맑은 것도 있었지만 코르마처럼 요구르트를 넣어 부드럽고 걸쭉하게 만든 것도 있었죠. 그리고 인도의 다양한 향신료들은 스튜를 끓일 때 조미료로 이용되었는데요. 다양하게 배합한 향신료들을 절구에 넣고 빻아 페이스트 형태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페이스트를 마살라라고 했죠 마살라에 들어가는 향신료의 배합은 개인적, 지역적, 종교적 선호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가령 고수나 커민은 인도 전역에서 사용되었지만 채소스튜나 생선스튜를 즐겼던 인도 남부에서는 생강이나 강황을 더했고 고기스튜를 즐겼던 인도의 이슬람교도들은 계피와 정향, 카르다몸, 후추 등을 더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스튜들을 밥이나 빵 같은 곡물음식과 곁들이는 것이 인도의 일반적인 식사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도의 다양한 스튜들을 커리라는 이름으로 묶는데요. 하지만 이 말은 전통적으로 인도 어디에서도 사용되진 않았습니다. 카레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우리는 16세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2. 커리의 탄생

오랫동안 유럽 의학의 중심은 체액설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인간의 몸이 혈액과 점액, 황담즙과 흑담즙이라는 네 가지 체액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고 이 균형이 무너질 때 온갖 질병 이 발생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체액들은 뜨거움, 차가움, 건조함, 축축함이라는 네 가지 성질의 결과로 발생한다고 여겨졌는데요. 때문에 유럽인들은 각 성질들의 균형을 맞춰 건강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차갑고 건조하기 마련인 겨울에는 뜨겁고 축축하다고 여겨진 닭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뜨겁고 건조하다고 알려진 생강이나 계피, 후추 같은 향신료를 뿌리면 닭고기의 장점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식이었죠. 물론 여기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지만 유럽인들이 왜 그토록 향신료를 집착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고대 로마의 상인들은 인도로 직접 가서 향신료를 들여왔는데요. 8세기 이후로는 이슬람 상인들이 이 무역로를 장악했지만 유럽의 향신료 수요는 좀처럼 줄지 않아서 유럽에서 향신료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여기에 11세기 이후에는 베네치아나 제노바가 유럽으로 들어오는 향신료를 독점하면서 안 그래도 비쌌던 향신료 가격은 더 뛰었죠. 후추가 같은 무게의 금과 같은 가격에 거래되었을 정도입니다.

때문에 유럽의 많은 상인들은 베네치아나 이슬람을 거치지 않고 직접 향신료를 얻는 방법을 고민했는데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49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바스쿠 다 가마는 마침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포르투갈은 인도 서해안에 있던 도시 고아를 점령한 뒤 이곳을 향신료 교역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고아에는 다양한 출신의 유럽인들이 모여들었고 16세기말까지 고아는 2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사는 도시가 되었죠. 그리고 이것은 카레라는 말을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도로 들어간 유럽인들은 자연스럽게 현지 요리들을 맛보았는데요. 특히 밥에 부어 먹었던 인도의 스튜 요리들을 가리켜 카릴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타밀어나 칸다나어 카리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카리는 채소, 고기, 후추라는 뜻이죠. 스튜 자체보다는 스튜에 들어간 건더기나 향신료를 가리키던 말이 인도에 있던 포르투갈인에 의해 카릴로 오해되었고, 이 말이 포르투갈어로 유입되어 카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때까지 제각각의 이름으로 불렸던 인도의 스튜 요리들이 그렇게 카리로 묶여 유럽에 소개되었습니다. 16세기말에는 영어로 유입되어 카레가 되었고 카레는 19세기말 일본어로 유입되어 카레가 되었으니 오늘 우리가 쓰는 카레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왔습니다.

 

3. 혼종화

16세기 유럽인의 인도 진출은 유럽에 커리라는 단어를 발생시켰을 뿐 아니라 유럽의 문화를 인도에 소개하며 여러 가지 혼종 요리를 낳기도 했습니다. 가령 이 무렵 남아메리카에서 고추를 접했던 포르투갈인들은 이것을 인도 고아로 가져가 전혀 새로운 카레를 탄생시켰죠. 오늘날 고아를 대표하는 커리, 빈달루입니다. 빈달루는 고추가 포함된 마살라에 고기를 재웠다가 물과 와인 비네거를 넉넉하게 붓고 끓인 스튜였습니다. 다른 예로 18세기 중반 벵골을 차지했던 영국인들은 이곳을 발판으로 19세기 중반까지 인도 전역을 식민화해나갔는데요. 영국의 많은 관료와 군인들이 식민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인도로 파견되면서 또 다른 혼종화가 일어났습니다. 19세기 영국 중산층의 식사는 일요일마다 큼직한 소고기나 닭고기를 오븐에 넣고 굽는 로스트비프, 로스트 치킨으로 대표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고기는 다음날 스튜를 만들어 먹었죠. 이때 인도 벵골에 머물렀던 영국인들은 영국식이 아닌 인도식 스튜, 즉 커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식사 후 남은 고기를 양파, 고추와 함께 재빠르게 볶아서 만든 카레, 잘프레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잘프레지는 오늘날 벵골 지역을 대표하는 카레이기도 하죠. 하지만 다양한 향신료를 그때그때 갈아 사용하는 건 대부분의 영국인들에게는 익숙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시간과 비용도 많이 드는 일이었는데요. 따라서 18세기 말까지 카레는 상류층의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말 몇몇 향신료들을 미리 갈아서 섞어놓은 카레 가루가 상품화되어 팔리자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향신료들을 일일이 갈아 마살라를 만드는 대신 커리가루를 넣기만 하면 되니 커리를 만드는 데 드는 수고가 크게 줄어들었던 겁니다. 비프 스튜, 치킨 스튜를 즐겼던 이들은 이제 비프 커리, 치킨 커리를 대중적으로 요리하기 시작했습니다.

 

4. 일본으로

영국에서 커리가 대중화되었던 19세기는 팍스 브리타니카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이 세계 인구의 1/4이 사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세계의 주요 해상 무역로들을 관리하면서 영국에 의한 평화가 지속되었던 시대를 팍스 브리타니카라고 합니다. 영국 해군은 세계 경찰을 자임하며 전 세계를 항해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기간 항해하다 보면 배에 실은 식량들이 상해버리기 쉬웠는데요. 따라서 커리처럼 자극성 강한 재료를 적극 활용해 식량의 보존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죠. 그렇게 영국 해군이 커리를 먹으며 전 세계 바다를 누비던 바로 그때 육지에서는 러시아가 페르시아와 오스만을 차례로 공략하며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영국인들은 러시아가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할 가능성을 경계했는데요. 1839년 영국은 러시아가 인도로 들어오는 길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1853년 크림전쟁에선 오스만과 동맹을 맺고 지중해로 진출하려던 러시아를 저지하기도 했죠. 이처럼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가 벌였던 패권다툼을 가리켜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합니다. 19세기 초중반 영국에 철저히 봉쇄당했던 러시아는 19세기 말이 되면 만주와 한반도로 눈을 돌렸는데요. 1858년 아이훈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까지 진출하며 러시아가 실질적인 남하 움직임을 보이자 1902년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어 일본을 러시아 견제를 위한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1904년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아가 1910년 한반도까지 식민화할 수 있었던 데는 영국의 직간접적인 지원이 있었죠. 영국 입장에서 일본과의 동맹은 자원을 적게 들이면서 러시아를 견제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영국과 일본의 동맹은 1923년까지 지속되었는데요. 그동안 양국 사이엔 군사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영국 해군의 함상식이었던 커리 또한 일본 해군에게로 전해졌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일본인들은 커리를 카레라고 발음했죠. 그때 일본에서 카레는 서양식당에서나 맛볼 수 있는 영국 커리와는 그다지 구별되지 않는 값비싼 서양요리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해군은 서양 문화에 관심 있는 소수의 일본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본인들이 먹는 음식으로 카레를 배급해야 했고 따라서 카레를 일본화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나갔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 커리는 무엇보다 고기 스튜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고기가 주재료로 들어간 음식을 좀 부담스러워했습니다. 1871년 육식금지령이 해제되었다곤 하지만 그 이전 무려 1200년 동안이나 일본은 육식이 금지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 해군은 영국의 커리 가루를 적극 이용하면서도 들어가는 고기의 양은 크게 줄였고 대신 감자나 당근처럼 서양 느낌이 나는 채소의 비율을 늘렸습니다.

오늘날 일본 카레의 전형적인 형태가 된 이 카레는 입문용 서양음식으로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한반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죠. 인도에서 영국으로 다시 일본과 한국으로 여러 문화의 교차와 혼합 속에서 카레 또는 커리라고 불렸던 이 인도식 스튜는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확장해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