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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에 환장하다

by 팔딴 2023. 6. 15.

프라이드 치킨

치킨, 엄밀히 말하면 '닭'이라는 뜻이지만 우리 모두 "치킨!" 하고 말할 때 그게 어떤 음식을 가리키는지를 압니다. '프라이드 치킨'이죠. 한국인에게 치킨은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닙니다. 2016년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요. SNS상에 치킨이 많이 언급될수록 행복에 대한 언급도 함께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죠. 한국인은 기분이 좋아 치킨을 먹고 치킨을 먹어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국인은 왜 치킨과 사랑에 빠졌을까요?.

1. 종교적 금기

프라이드 치킨의 역사는 13세기 지중해 일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서유럽은 로마 가톨릭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 있었는데요. 예수의 죽음 전 40일간을 일컫는 사순절을 가톨릭 교회는 속죄와 참회의 날로 지정 이 기간에는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금기가 이어질수록 고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이들은 금기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고기와 비슷한 만족감을 느낄 방법을 고민했는데요. 그 결과 찾아낸 것이 바로 튀김이었습니다. 금육기간에도 먹을 수 있었던 야채나 생선에 밀가루를 뿌리거나 반죽을 입혀 튀겨냈죠. 포르투갈의 야채튀김 '페이시뉴 다 오르타' 스페인의 생선튀김 '페스카도 프리토'가 바로 13세기 무렵 탄생한 음식들입니다. 이중 페스카도 프리토는 15세기에 영국으로 전해져 '피시 앤 칩스'로 발전했죠. 튀김은 바삭바삭한 식감과 고소한 풍미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닭고기를 튀길 생각 그러니까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 생각을 맨 처음 떠올린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15세기에 프랑스인들은 치킨의 먼 조상이 되는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프리카세'라는 음식인데요. 닭고기를 살짝 튀긴 뒤 화이트 소스를 붓고 끓였기 때문에 사실 튀김보다는 스튜에 가까운 음식이었죠. 프리카세는 영국으로 전해졌고 특히 스코틀랜드인들로부터 사랑받았습니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인들이 먹었던 프리카세는 닭고기를 조각낸 뒤 계란물과 빵가루를 묻혀 갈색이 나도록 튀긴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음식도 우리가 아는 프라이드 치킨과는 좀 거리가 있었죠. 치킨이 우리가 아는 치킨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습니다.

2. 영혼의 음식

18세기에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했는데요. 그중 많은 이들은 버지니아, 캐롤라이나 같은 남부에 정착했습니다. 바로 이곳, 미국 남부에서 치킨은 우리가 아는 치킨이 되었습니다. 19세기에 미국 남부 면화농장에서 일했던 흑인 노예들이 이 변화의 주인공입니다. 당시 미국은 영국 자본이 흘러들면서 남부의 면화산업이 급성장하고 있었는데요. 덕분에 1820년에는 미국이 인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면화 생산국이 되기도 했죠. 그리고 흑인 노예는 이 면화산업의 핵심 노동력이었습니다. 이들이 원래 살던 곳은 서아프리카 서아프리카는 무더운 기후가 이어지는 땅입니다. 때문에 음식이 쉽게 상하는 걸 막기 위해 향신료를 강하게 치는 문화가 발달했죠. 그리고 이곳에 살던 흑인들이 아메리카로 끌려오면서 아프리카의 향신료 문화는 유럽의 튀김 문화와 만납니다. 재산을 가질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던 흑인 노예들에게 닭은 기르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동물이었는데요.

흑인노예의 소울푸드

때문에 이들은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이면 기르던 닭을 잡아 프라이드 치킨을 요리해 먹곤 했습니다. 닭고기를 조각낸 뒤 갖가지 향신료와 소금에 버무렸고 스코틀랜드의 방식대로 튀김옷을 입혀 튀겼죠. 그 결과 강한 향미가 배어나오는 미국 스타일의 독특한 프라이드 치킨이 탄생했습니다. 고통스러웠던 노예 시절 프라이드 치킨은 흑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몇 안되는 음식이었습니다. 프라이드 치킨을 '흑인의 소울푸드'라고 부르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3. 켄터키와 코리안

미국 특색의 프라이드 치킨을 세계적인 음식으로 발돋움시킨 건 KFC였습니다. KFC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약자인데요. 하지만 1952년에 KFC가 처음 문을 연 곳은 엉뚱하게도 켄터키 주가 아니라 유타 주였습니다. 켄터키라는 이름은 창립자인 커널 샌더스가 켄터키 주에 살 때 만든 치킨 스타일을 계승한다는 뜻이죠. 샌더스는 11가지의 향신료를 배합해 자신만의 비밀 양념을 개발했고 이를 통해 개성있는 풍미를 가진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어냈는데요. 이것은 KFC가 미국 사회에서 인기를 끈 가장 큰 비결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비결은 샌더스가 개발한 압력튀김기였습니다. 압력이 높아지면 액체는 더 높은 온도에서 끓습니다. 때문에 압력튀김기에서 닭고기를 튀기면 더 고온에서 튀겨지기 때문에 식감이 부드러워지죠. 비밀양념과 압력 튀김기라는 두 개의 무기를 든 KFC는 미국과 전 세계의 시장을 공략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인들에게 프라이드 치킨을 각인시켰죠. 1970년대 초 한국에는 닭 한 마리를 통째로 튀긴 '통닭'이라는 음식이 팔리고 있었는데요. 이 통닭은 닭고기를 조각내지도 않았고 향신료들을 배합해 밑간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국식 프라이드 치킨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흑인들에게 프라이드 치킨이 귀한 날에만 먹는 음식이었던 것처럼 1970년대 한국인들에게도 통닭은 마찬가지 존재였습니다. 아버지 월급날이나 생일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이 되면 가족은 옹기종기 둘러앉아 통닭을 뜯으며 그 날을 기념했죠. 통닭은 축제의 음식이었습니다. 프라이드 치킨이 치고 들어오기 시작한 건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일이었습니다. 1977년 림스치킨을 시작으로 페리카나, 처갓집 같은 치킨 프랜차이즈들이 등장했고 마침내 1984년 KFC가 한국에 진출하며 정점을 찍습니다. 그러면서 치킨은 통닭을 밀어내고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닭 요리가 되죠. 하지만 모든 한국인들이 치킨과 사랑에 빠졌던 건 아닙니다. 프라이드 치킨은 매우 기름진 음식이라 느끼함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 단점을 적절히 보완했던 게 바로 1980년대 말에 등장한 양념치킨이었습니다.

양념치킨

대전의 페리카나, 그리고 대구의 맥시칸은 고추장이나 간장, 마늘, 물엿 등을 섞어 매콤달콤한 소스를 만들었는데요. 이 소스는 치킨의 느끼함을 잡아줘 한국인들이 포기하지 않고 치킨을 다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맥시칸에서 만든 치킨 무 역시 마찬가지 역할을 했죠. 양념치킨과 치킨 무의 등장은 기존의 프라이드 치킨을 싫어했던 이들까지 소비층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럼으로써 치킨을 국민간식의 반열에 올려놓은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죠. 한편 다른 시선으로 보면 양념치킨은 'K-치킨'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고추장, 간장, 마늘처럼 가장 한국적인 재료들로 한국 스타일의 프라이드 치킨을 개발한 것이기 때문이죠.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음식이라 꽤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KFC가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약자가 아니라 '코리안 프라이드 치킨'의 약자라는 우스개소리마저 나올 정도죠. 켄터키와 코리안 사이 그 어딘가에 오늘날의 치킨이 있습니다.

 

4. 축배의 향연

한국인이 프라이드 치킨의 느끼함을 독특한 소스나 치킨 무로만 잡은 건 아니었습니다. 콜라나 맥주처럼 청량감을 주는 탄산음료가 치킨과 궁합이 맞는 음료로 낙점되었죠. 1982년 프로야구 출범,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굵직굵직한 스포츠 축제들이 줄이어 개최되면서 치킨과 맥주는 한국식 축제 음식으로 자리를 잡아나갔습니다. 정점을 찍은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는데요. 한국 대표팀이 4강에 진출하던 기적같은 순간 많은 사람들은 한 손에 닭다리 한 손에 맥주를 들며 그 순간을 기념했습니다. 뜨겁게 환호했던 그해 여름이 기억이 그 감정이 치킨과 맥주 안에 오롯이 스며들었죠. 2002년 이후 치킨집 수는 급증했고 '치맥'이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졌습니다. 치킨은 자타공인 축제의 음식이 된 겁니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건 그 음식이 내포하고 있는 '어떤 관념'을 먹는 것이기도 합니다. 늘날 한국인은 왜 치킨을 먹을까요? 리가 치킨을 뜯으며 꿀꺽 삼킬 때 너머로 넘어가는 건 단순한 고기가 아닙니다. '행복'이라는 관념이기도 하죠 즐거운 자리에서 더 즐겁기 위해 먹기도 하지만 무료한 삶의 순간에 축제를 일으키고 싶을 때 한국인은 치킨을 찾습니다. 한국인은 이렇게 치킨과 사랑에 빠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