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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도 매운 음식을 잘 먹었다?

by 팔딴 2023. 6. 15.

여러분은 매운 것 잘 드시나요? 저는 좋아 하기는 하지만 매운 것을 잘 먹지는 못합니다. 사실 우리가 맵다고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르다고 합니다. 미국 향신료업체 칼섹의 2019년 자료에 따르면 유럽 지역 소비자들이 가장 맵다고 느끼는 정도는 아시아 지역 소비자들에겐 여전히 순한맛 수준인 걸로 나타났죠. 유럽인은 왜 매운 음식을 잘 먹지 않을까요? 놀랍게도 50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 유럽의 귀족들이 먹던 음식은 후추를 많이 쳐서 무척 매웠고 매울수록 고급음식 대접을 받았죠.

 

1. 부의 상징

인도 남서부의 말라바르 해안 이곳에는 큰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한 덩굴식물이 자랍니다. 이 식물의 덜 익은 초록색 열매를 따서 햇빛에 말리면 쪼글쪼글해지며 검은색을 띠는데요.

부의 상징, 후추

우리는 이 열매를 '(흑)후추'라고 부릅니다. 후추는 특유의 맛과 향이 입맛을 돋우기 때문에 고대부터 무척 사랑받는 식재료였습니다. 살균 효과도 있어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 방부제로 쓰기도 했죠. 역사적으로 후추 사랑이 각별했던 이들은 로마인들이었는데요. 얼마나 각별했냐면 로마시대 요리책 《아피키우스》에 나오는 500여 개의 레시피 중 후추가 사용된 건 무려 80%에 달하죠. 로마인들은 왜 후추에 열광했던 걸까요? 그들에게 인도는 미지의 세상이었습니다. 당시 인도를 정확하게 그린 지도는 존재하지 않았고 인도에 직접 가본 로마인도 드물었죠. 때문에 후추를 맛본다는 건 그 신비로운 세상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요. 후추가 인도에서 로마로 전해지기까지는 구간마다 위험한 순간들이 도사렸습니다. 폭풍우를 만날 수도 있었고 해적을 만날 수도 있었죠. 잠시 기착할 때마다 현지에서 팔리는 물량도 많았습니다. 때문에 로마에 도착할 때쯤이면 후추는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량 부족에 이런저런 위험비용, 마진 동방에서 왔다는 신비감이 합쳐져 후추에는 아주 비싼 값이 매겨졌습니다. 후추가 같은 무게의 금과 맞교환되기도 했을 정도니 마인들에게 후추는 향신료 그 이상이었습니다. 선망의 대상이었고 부와 권력의 상징었죠. 음식에 후추를 뿌린다는 건 금가루를 뿌리는 것과 같았고 로마의 귀족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경쟁하듯 후추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유럽 지배는 후추에 대한 취향을 유럽 전역에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5세기 중반 서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유럽의 귀족들은 후추로 범벅된 엄청나게 매운 음식을 먹었습니다. 매우면 매울수록 고급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매운맛이 식재료 본연의 맛을 완전히 가려버리기도 했죠. 매운맛은 선망의 맛 고급의 맛이었습니다.

 

2. 후추 쟁탈전

이렇게 '맵부심' 넘치던 유럽이 오늘날 소위 '맵찔이의 대륙'이 된 건 왤까요? 그 배경에는 후추 쟁탈전이 있었습니다. 10년 이슬람교가 창시된 이후 이슬람 제국은 무섭게 세력을 확장해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무슬림 상인들은 인도로부터 후추를 독점 매입해 동지중해 연안으로 실어날랐고 유럽 상인에게 비싸게 팔았죠. 이때 후추값을 올려받기 위해 온갖 과장된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는데요. 그중 하나는 후추나무를 지키는 뱀 이야기였습니다. 7세기 초에 출간된 《어원학》에 따르면 유럽인들은 후추나무를 지키는 독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후추를 따려고 하면 독사가 달려들기 때문에 나무에 불을 질러 독사를 쫓아냈고 이때 후추도 불에 그을려 검은색을 띠게 되었다는 거죠. 물론 거짓말입니다.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채취한 후추인만큼 높은 가격을 받아야 한다며 지어낸 이야기였습니다. 덕분에 중세 유럽의 후추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몇 배나 비쌀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추의 인기는 식을줄 몰랐는데요. 애초에 후추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유럽의 상류층이었고 그들에게 가격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상인 입장에서도 비싸게 사면 더 비싸게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후추 무역은 여전히 수지맞는 장사였죠. 따라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후추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점점 심화되었는데요. 14세기 말에 이르러 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건 베네치아였습니다. 베네치아는 강력한 해군을 앞세워 동지중해를 장악한 뒤 맘루크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럽의 후추 무역을 독점했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네치아의 성공은 이내 다른 나라들을 자극했습니다. 15세기가 되면 지중해가 아닌 다른 루트를 통해 후추 무역에 참여하려는 나라들이 나타났는데요. 대표적인 게 포르투갈입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갈 계획을 세웠고 이것은 유럽이 '맵부심의 대륙'에서 '맵찔이의 대륙'으로 변화하는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15세기 내내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단계를 밟아나갔습니다. 1434년 보자도르 곶 1444년 베르데 곶에 도달했고 1487년에는 아프리카 최남단에 있는 망봉을 찍는 데 성공했죠 그리고 1498년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가 마침내 인도 말라바르 해안에 도달했습니다. 전통적인 교역로를 대체할 새로운 교역로가 열린 겁니다. 물론 수세기 동안 후추 무역을 장악했던 이슬람 세력이 순순히 시장을 내줄 리 없었습니다. 이들과 이해관계가 같았던 베네치아도 마찬가지였죠. 베네치아는 맘루크를 부추겨 포르투갈을 견제하려 했는데요. 하지만 1509년 2월 포르투갈은 디우 앞바다에서 루크와 구자라트의 연합함대를 격파 이슬람과 베네치아의 견제를 뿌리치는 데 성공했죠. 이 승리를 발판으로 포르투갈은 6세기 초 인도와의 후추 무역을 독점했습니다. 인도 남부의 고아에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후추 수입을 안정화했고 1515년 페르시아만에 있는 항구도시 호르무즈를 점령 무슬림 상인들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차단했습니다. 그러자 유럽의 부가 포르투갈로 흘러들었습니다.

 

3. 대폭락

하지만 상황은 곧 바뀌었습니다. 1540년대에 오스만 제국이 부상하면서 포르투갈의 후추 독점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1453년 동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은 1517년 맘루크까지 정복하며 전통적인 교역로를 완전히 장악했는데요. 이 침체된 교역로를 활성화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습니다. 1538년에는 인도양 원정을 떠나 포르투갈을 공격했고 1548년에는 홍해의 항구도시 아덴을 점령했죠. 포르투갈 역시 아덴을 점령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오스만의 완고한 방어에 막혔습니다. 그리고 이 실패는 후추의 운명을 바꾸어놓습니다. 만약 호르무즈에 이어 아덴마저 점령했다면 포르투갈은 전통적인 교역로를 모두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고 후추 독점 역시 상당기간 유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스만의 통제 아래 홍해를 통하는 무역로가 다시 열림으로써 위축되었던 지중해 상권은 활기를 띠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후추가 유럽으로 들어오는 루트만 두 개로 늘어난 셈이 되었죠. 여기에 17세기부터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포르투갈이 개척한 루트를 따라 후추 무역에 뛰어들었고 유럽에 후추를 공급하는 또 다른 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다양한 나라를 통해 후추가 공급되면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후추 가격이 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급'이라는 건 '한 사회의 상류층이 그것을 독점했는가' 여부와 밀접한 관련을 갖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누구나 후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유럽의 상류층은 좀 다른 눈으로 후추를 보기 시작했죠. 후추를 듬뿍 친 음식은 그리고 매운맛은 고급스럽다기보다는 상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누구나 그 맛을 맛볼 수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말입니다. 운맛이 다른 모든 맛을 덮는 것보다 양념을 좀 약하게 해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음식이 상류층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걸 '누벨 퀴진'이라고 부르죠 오늘날 유럽의 음식이. 특히 고급으로 분류될수록 매운맛을 잘 찾아볼 수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매운맛을 즐기지 않으니 그 맛을 느끼는 감도도 좁아 우리에겐 조금 매운 것이라도 유럽인들은 많이 맵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유럽은 이렇게 '맵찔이의 대륙'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