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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부터 영수증의 개념을 알았을까?

by 팔딴 2023. 7. 12.

약 30만 년 전 동아프리카 일대에 출현했던 호모 사피엔스 약 12만 년 전 이들 일부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서아시아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한 무리는 유럽으로, 다른 무리는 동쪽으로 뻗어갔습니다. 동쪽으로 나아간 무리는 히말라야 산맥을 경계로 다시 갈라져 각각 아시아 전역과 오세아니아로 들어갔죠. 여기까지가 약 3만 년 전까지 일어난 일입니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 오세아니아로 이주할 수 있었던 건 당시가 빙하기였기 때문인데요. 전 세계 해수면이 오늘날보다 최대 100m 이상 낮아 오늘날 바다인 곳들 중엔 옛날에 땅이었던 곳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북아시아와 북아메리카도 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때문에 약 2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메리카를 걸어서 건너갔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에 걸쳐 사는 종이 된 호모 사피엔스는 각지의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각각 니그로이드, 코카소이드, 몽골로이드, 오스트랄로이드 등으로 구별되는 조금씩 다른 특징을 갖게 되었는데요. 예를 들어 시베리아의 추위를 이겨내야 했던 북방계 몽골로이드는 체지방량이 많고 키가 작은 편이 열량을 보존하는 데 유리했습니다. 반면 뜨거운 햇빛을 견뎌야 했던 니그로이드나 오스트랄로이드는 피부를 검게 하는 멜라닌 색소가 많아야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할 수 있었죠.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전 지역에서 살아남는 데 신체적 적응이 기여한 부분은 사실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은 따로 있는데요. '문화를 형성하는 능력'입니다. 일정한 규모의 공동체가 공동의 삶의 방식을 공유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합니다.

돌연변이로 질병에 더 강한 유전자가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우연한 사건으로 더 나은 아이디어나 도구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는 서로를 모방하고 기억함으로써 문화를 만들었고 이 문화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를 형성했죠. 인간만의 합리적 삶을 모색했던 도시들 이야기 폴리스, 오늘의 도시는 '우루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 2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홀로세라 불리는 현재의 온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간헐적인 기온변동을 제외하고는 기후가 크게 안정되어서요.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게 되자 호모 사피엔스 중 일부는 농사를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약 1만 1천 년 전부터 4천 년 전까지 전 세계 최소 7곳에서는 조금씩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형태의 농업이 독자적으로 발달했고 우리는 이것을 '농업혁명'이라고 합니다. 농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오늘날의 레반트 지역입니다. 약 1만 1천 년 전 이곳 사람들은 밀이나 보리 같은 작물을 길들여 재배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인근에서 풀을 뜯으며 살던 동물들이 먹을 것을 찾아 마을 근처까지 접근하는 일이 발생했고 어떤 농부들은 이들을 포획해 가축으로 삼았죠. 바로 잡아먹지 않았던 건 나중에 먹을 것이 부족해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 레반트의 농경문화는 사방으로 전파되어 곳곳에 소규모의 정착촌들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런데 약 6천 년 전 즉 기원전 4000년경 또 한 번의 기후변화가 일어나 서아시아 지역이 오늘날처럼 건조한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강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죠. 이제 강 주변의 정착촌들은 점점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살려야 하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때 가장 두각을 드러냈던 정착촌이 바로 '우루크'였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인데요. 우르크 사람들은 이것보다는 원초적이지만 원리는 같은 수로를 건설했고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물을 끌어들여 광활한 땅을 경작지로 개간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이것을 '관개'라고 합니다.

이 관개 덕분에 우루크는 대규모 인구를 먹이고도 남는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죠. 그리고 이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밀집해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서로의 의견을 활발하게 교류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우루크는 온갖 혁신의 요람, 최초의 도시, 문명의 시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루크의 도공들은 바퀴 달린 물레를 발명해 도자기를 이전보다 더 빨리, 훨씬 더 좋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상인들은 도공들이 생산한 도자기에 농부들이 생산한 식량을 담아 다른 지역으로 가져갔고 여러 전략물자나 귀중품과 교환해 돌아왔죠. 이때 상인들이 물자를 나르는 데 이용했던 수레의 바퀴는 물레의 바퀴를 전용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 분야의 혁신이 다른 분야의 혁신을 낳았던 겁니다. 또 도공들이 도자기를 구웠던 가마는 구리를 녹여 무기를 만드는 데에도 이용될 수 있었죠. 이러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교역의 활성화는 또한 정치의 등장을 낳았는데요. 재산의 개념이 발생하고 '무엇이 내 것인지'를 놓고 다투는 일이 잦아지면서 이 분쟁을 통제하는 일이 점점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3500년경 우루크의 야심만만한 몇몇 신관들은 기존의 신전을 증축해 거대한 건물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이 신전을 중심으로 밀집해 살아가도록 했죠. 우루크가 최초의 도시로 발전한 게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도시 주변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세금으로 거둔 뒤 시민들에게 '각자 기여한 바에 따라' 분배했죠. 그것은 아마도 최초의 정치였을 겁니다. 최초의 정치는 최초의 숫자와 문자를 낳았습니다. 징세와 분배 업무를 처리했던 신전의 관료들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었고 따라서 기억을 따로 저장해둘 어떤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인데요. 약 4천 6백 년 전의 영수증입니다. 2만 9,086자루의 보리를 37개월에 걸쳐 전달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죠. 그리고 그 옆에는 '쿠심'이라는 단어가 발견됩니다. 아마도 이건 이 업무를 처리한 관료의 이름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역사상 최초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어떤 자들이 다른 자들에 비해 더 많이 배분받을 자격이 있다고 평가받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재산의 상속으로 누군가는 유리한 출발선상에서 경쟁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강자와 약자 간 힘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죠. 재산의 출현은 정치의 출현을 정치의 출현은 계급사회의 출현을 낳았습니다. 기원전 2900년경 우루크에는 성벽이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징후였죠. 우루크가 세상에 선보인 '도시'라는 문화는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며 수많은 후발주자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우루크를 비롯해 우르(Ur), 움마(Umma), 라가시(Lagash) 등 몇개의 유력도시들은 서로 우위에 올라서기 위한 세력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도시의 권력도 신관에게서 장군에게로 옮겨갔고 장군들은 자신의 지위를 세습하면서 '왕'이 되었습니다.. 각각의 왕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키엔기르'라고 불렀는데요. 그것은 '고귀한 통치자의 땅'이라는 의미였고 이 말은 훗날 아카드어로 번역되어 '수메르'라고 불렸습니다. 키엔기르보다는 수메르라는 말이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저도 이 지역을 수메르라고 지칭하겠습니다. 기원전 2500년경 수메르는 서로 물고 물리는 거대한 투쟁의 공간이었습니다. 간혹 한 도시가 패권을 차지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또 다른 도전자에 의해 곧 권좌에서 내려오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가령 이 무렵 라가시의 왕 에안나툼은 키시와 우루크, 움마를 무릎꿇린 뒤 수메르의 패권을 가져왔습니다. 기원전 2350년경에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법령을 반포하는 등 부조리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나름대로 기울였음에도 불구 라가시는 얼마 뒤 움마의 반란을 맞아 몰락하고 말았죠. 이때 라가시를 정복했던 움마의 왕 루갈자게시 그는 우루크를 수도로 삼아 수메르 전역을 통치하려 했지만 얼마 안 가 마찬가지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셈인의 일파인 아카드인들이 수메르로 쳐들어왔던 겁니다. 이후 아카드는 동쪽의 엘람, 북쪽의 수바르투, 마르투를 공략하며 서로 이질적인 공간을 지배하는 역사상 최초의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물고 물리는 전쟁의 시대가 거대한 하나의 권력에 의해 통치되는 제국의 시대를 열어젖힌 겁니다. 물론 아직은 그렇게 거대한 나라가 오래 유지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카드 제국은 역사에 새로운 패턴을 부여했습니다. 아카드 제국이 퇴장한 이후 각각의 도시들은 이제 제국으로 발돋움하려는 분명한 경향성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2130년경 우루크는 우투헤갈의 지휘 아래 수메르 지역에서의 세력을 회복했고 우투헤갈 사후, 그를 계승한 우르남무는 우루크가 아닌 우르를 수도로 정한 뒤 아카드까지 세력을 넓히며 수메르인의 제국을 세웠습니다. 이 수메르 제국은 동서남북으로 뻗은 무역로를 장악한 데 힘입어 다시 한 번 수메르인의 전성기를 열어젖혔죠.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불꽃이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1700년대에 셈인의 일파인 아모리인의 나라 바빌로니아가 수메르 전역을 석권하면서 수메르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나라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수메르인'이라는 민족 정체성 역시 서서히 사라져갔죠. 하지만 우루크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던 많은 문화들은 여전한 생명력을 가진 채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 같은 대제국에 계승되었고 각자의 입맛에 맞게 변주되고, 개량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뗐을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