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안에 넣고 보이지 않게 가리거나 둘러 만 음식. 쌈은 지구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관행입니다. 그래서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는 그 지역만의 개성을 가진 독특한 쌈 요리들을 맛볼 수 있죠. 인류는 왜 음식을 싸서 먹기 시작했을까요?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한반도의 쌈 요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1. 쌈 싸 먹기
우리가 쌈을 먹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지금이야 뭔가를 집을 때 도구를 사용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이 당연한 것이 정말 당연하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17세기 독일의 한 정치가는 샐러드를 포크로 먹는 게 바보짓거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때까지 포크는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도구가 아니었던 것이죠. 포크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19세기 말까지도 파스타를 손으로 집어먹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사정은 우리도 비슷했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젓가락이 한반도에서 일반화되기 시작한 건 아무리 빨라도 18세기 이후였죠. 물론 상류층이 젓가락을 사용한 건 그보다 훨씬 이전이었지만 대부분의 서민들은 대체로 밥과 국 위주로 식사를 했기 때문에 숟가락만 있으면 됐고요. 가끔 반찬을 집어야 할 때는 손을 이용하면 그 뿐이었습니다. 젓가락 사용의 일반화는 서민의 밥상에서 반찬의 가짓수가 늘어나는 현상과 밀접하게 맞물려 일어났죠. 포크와 젓가락 이전에 손이 있었습니다. 손은 인간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유롭게 사용하는 도구였죠. 하지만 이렇게 손으로 음식을 집을 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요. 음식에서 새어 나온 즙이나 양념 때문에 손이 쉽게 더러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쌈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의 하나로써 개발되었을지도 모르죠. 채소나 해조류처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음식을 싸서 먹으면 식사를 좀 더 깔끔하게 마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싸 먹는 것도 꽤 별미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의 상상력이 가미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쌈을 싸서 바로 먹지 않고 오븐에 굽거나 증기로 쪄봤고요. 누군가는 채소나 해조류가 아니라 곡물의 알곡을 갈아서 쌈 재료를 만들어봤죠. 그렇게 해서 쌈은 좀 더 정교한 요리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2. 보편과 특수
인류는 각자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이용해서 쌈을 쌌습니다. 문명이 태동한 이래 쌈 재료로 가장 많이 이용되었던 건 역시 곡물입니다. 그중 최고는 글루텐이 잘 형성되는 밀이었죠. 레반트의 피타나 이탈리아의 피아디나, 중국의 시엔빙, 인도의 난 등이 그렇습니다. 이외에도 한국의 전병이나 러시아의 블리니는 메밀을, 베트남의 바인 짱이나 인도의 도사는 쌀을, 에티오피아의 은저라는 테프를, 말리의 은고메는 기장을, 아이슬란드의 플라트카카는 호밀을, 멕시코의 토르티야나 베네수엘라의 아레파는 옥수수를 이용해서 납작한 빵, 플랫브레드, 만두피, 라이스페이퍼 등으로 불리는 쌈 재료를 만들었죠. 그리고 그 위에 각자가 즐기는 고기와 채소를 올려서 쌌습니다. 곡물로 만든 빵이나 피는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쌈 재료입니다. 한국인들도 메밀이나 밀로 만든 전병을 이용해 뭔가를 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쌈이라고 여겨지진 않았죠.
바로 여기에 한국 쌈이 갖는 특수함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쌈은 무엇보다도 채소에 싸 먹는 것을 의미하죠. 물론 해외에도 채소 쌈이 있지만 한국의 채소 쌈은 어느 한 채소만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다양한 채소들을 골고루 이용한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한국인들은 왜 이런 쌈 문화를 형성해왔던 걸까요?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터를 잡고 살았던 공간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한반도는 70퍼센트 이상이 산으로 되어 있는 땅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 늘 산을 바라보며 살았고 널리 베푸는 산으로부터 정기를 받으며 자란다고 믿었습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산에서 자라는 다양한 채소들 또한 그렇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외면되는 일 없이 쓸모를 찾았죠. 채소의 넓은 이파리를 이용해서 쌈을 싸는 한반도 특유의 쌈 문화는 바로 이러한 배경 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3. 쌈의 문법
쌈 문화가 발전하고 성숙해지면서 한반도 사람들이 쌈을 싸는 데 이용하는 채소의 종류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산에서 자생하던 것 들뿐 아니라 외국에서 새로 들여와 기른 채소들이 추가되었고 나중에는 미역이나 김처럼 바다에서 채취한 해조류가 더해지며 한반도 쌈의 라인업이 완성되죠. 이렇게나 다양했던 쌈 재료들 중 유독 사랑받았던 채소는 무엇이었을까요? 18세기의 학자 이익은 말합니다. 한반도에는 채소 중 잎이 큰 것을 이용해서 쌈을 싸는 풍속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와거'라 불렸던 채소를 제일로 쳤다고요. 그래서 집집마다 와거를 심었다는데요. 여기에서 말하는 와거는 오늘날의 '상추'를 의미합니다. 날것으로 먹는 쌈 채소들 중 대장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와거의 다른 말은 '생채'였고 생채라는 단어가 시간이 흘러 '상추'로 변화하면서 오늘날의 이름을 갖게 되었죠. 그리고 상추쌈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한반도 사람들이 가장 사랑했던 쌈의 방식이었습니다. 이건 18세기 한반도의 농촌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한 아낙이 요기거리를 머리에 이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데요. 아낙이 가고 있는 방향을 따라가 보면 들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이 보입니다. 농부들은 아낙이 들바라지 음식을 가져오면 근처 텃밭에서 기르던 상추를 따서 손바닥 위에 올린 뒤 보리밥과 고추장, 파뿌리 등을 올려서 싸 먹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것은 농부의 상추쌈이었죠. 지체 높은 양반들의 상추쌈은 그보다 고급졌는데요. 17세기 초에 발간된 한 소설집에는 그 즈음의 양반들이 먹었던 상추쌈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밴댕이에 기름간장을 발라 석쇠에 구운 뒤 물기를 탈탈 턴 상추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쌀밥과 고소한 된장, 노릿노릿 잘 구워진 밴댕이를 올려서 싸 먹습니다. 이것은 양반의 상추쌈이었습니다. 한국의 쌈은 음식을 감싸서 함께 먹는다는 점에서 전 세계 쌈 문화의 보편을 따릅니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채소와 해조류를 쌈 재료로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특수하죠. 최근에는 치커리나 케일처럼 원래 서양 샐러드에 들어갔던 채소들도 쌈 재료로 재발견되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을 감싸든 무엇으로 감싸든 쌈은 결국 같은 문법을 따릅니다. 무언가를 싸서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서스펜스'를 만들고 입 안으로 들어가 쌈 재료가 터질 때 속에 있는 것들이 '발견'되죠. 이 서스펜스의 형성과 발견의 순환이야말로 '쌈'이라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의 문법이고 같은 음식이라도 싸 먹을 때 더 맛있게 느껴지게 하는 마법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쌈을 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