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10%
우리의 행성, 지구. 지구에서 땅이 차지하고 있는 총 면적은 약 1억 4900만 제곱킬로미터입니다. 퍼센티지로 보면 전체의 3분의 1 정도죠. 이중 빙하나 사막처럼 척박한 땅을 제외하면 인류가 살 수 있는 땅은 3분의 2를 조금 넘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먹을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땅 중 오늘날 작물 재배에 이용하고 있는 비율은 겨우 10% 남짓에 불과합니다. 너무 덥거나 건조해도 안되고 너무 춥거나 바위로 덮여 있어도 안되죠. 작물을 기르려면 여러 조건들이 모두 적절한 수준을 유지해야 하고 아쉽게도 그런 지역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이미 척박한 지역에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던 동물들을 이용하는 것이었죠.
자연의 순환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에 동서로 풀이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인도양에서 습기를 머금고 올라오는 바람은 티베트 고원과 쿤룬 산맥, 히말라야 산맥, 파미르 고원, 힌두쿠시 산맥, 이란 고원, 자그로스 산맥 등에 가로막혀 비를 모두 쏘아버리기 때문에 그 너머에는 매우 건조한 기후대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막들이 포진해 있고요. 북쪽으로 가면 좀 추워지긴 해도 북극해에서 내려오는 습기 덕분에 식물이 살기에는 좀 더 괜찮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여전히 작물이 자라기는 힘들지만 풀은 자랄 수 있죠. 풀은 이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대륙에서 번성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육지의 약 40% 정도는 풀로 뒤덮여 있죠. 우리가 작물을 재배하는 땅보다 훨씬 넓은 면적에서 풀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풀을 식량으로 이용할 순 없었습니다. 풀은 광합성을 통해 얻은 영양분을 대부분 생장점이 있는 땅 부근에 저장하고 우리나 다른 동물들에게 노출되기 쉬운 잎에는 거의 남겨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잎은 매우 질겨서 먹는다 해도 그나마 있는 영양분을 제대로 소화시키기도 쉽지 않죠. 이는 풀이 동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동물의 먹이로 적합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한 결과입니다. 그런데요. 양이나 염소, 그리고 소 같은 ‘소과 동물’들은 끝내 풀을 먹이로 이용하는 법을 찾아냈습니다. 이들이 우리와 다른 점은 네 개의 위(胃)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네 개의 위는 제각각 다른 역할을 하죠. 소과 동물들이 풀을 먹으면 풀은 가장 먼저 첫 번째 위로 들어갑니다. 이곳은 미생물들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발효통으로 기능하는데요. 우리가 콩을 발효시켜서 영양분이 풍부한 된장을 만들듯 소의 첫 번째 위는 풀을 발효시켜서 영양분이 풍부한 풀죽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발효된 풀죽은 두 번째 위를 거쳐 식도로 되돌아가는데 소과 동물들은 이걸 다시 한 번 우물우물 씹어서 삼킵니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연할 대로 연해진 풀죽은 마침내 세 번째 위를 거쳐 네 번째 위로 넘어가 몸 속으로 소화되고 흡수됩니다. 덕분에 소과 동물들은 영양분이 적고 매우 질긴 풀만 먹고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과 동물들은 풀의 땅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들을 길들여서 풀의 땅 위에 펼쳐놓으면 작물을 재배하지 않고도 이들에게서 얻은 젖과 고기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가치 있는 것을 또 다른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을 ‘리사이클링’이라고 한다면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을 ‘업사이클링’이라고 합니다.
소과 동물들은 우리에게는 쓸모가 없는 풀을 먹으면서 우리에게 유용한 젖과 고기를 주었던 ‘업사이클러’였습니다. 훌륭한 업사이클러였던 소과 동물들이 여러 문화권에서 중요하게 대접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소과 동물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소’는 더욱 그랬는데요. 유대인의 경전인 《출애굽기》를 보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한 유대인들이 금으로 수송아지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이것을 우상이라고 주장하며 파괴하지만 사실 소는 고대 문명권에서 최고신을 묘사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형상이었습니다. 수메르의 아누와 이집트의 프타, 가나안의 엘, 히타이트의 테슈브, 그리스의 제우스는 모두 그 지역의 최고신이면서 동시에 소의 형상으로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가 하면 지중해 전역을 누비며 해상활동을 업으로 삼았던 페니키아인들은 두 개의 뿔이 달린 소의 머리를 추상화해 알파벳의 첫 글자인 A를 만들었습니다. 첫 글자를 소의 머리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 글자를 사용하던 이들에게 소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또 라틴어에서는 소의 머리를 의미하는 카푸트(caput)가 어떤 중요한 것을 비유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고요. 이 말은 영어로 전해져 ‘수도’나 ‘자본’을 의미하는 단어 캐피털(capital)이 되는데요. 과거에는 캐피털도 어떤 중요한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많이 쓰였죠. 소는 실질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힘과 연관되는 동물이었고 이러한 연관성은 우리가 소고기를 인식하는 방식에도 분명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소고기를 먹으면 소가 가진 그 엄청난 힘을 흡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소고기는 종종 약으로 이용되었고요. 그래서 더욱 귀한 것으로 여겨져 주로 사회의 힘 있는 이들에 의해 독점되기도 했죠. 소고기가 힘을 준다는 믿음은 실제로도 근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백질 20g을 섭취하려면 1000g이 넘는 감자나 650g의 현미를 먹어야 하지만 소고기는 단 70g만 있어도 되죠. 즉 소고기는 가장 효율적으로 단백질을 얻을 수 있는 음식이고 우리의 몸 안에서 단백질은 근육이나 뼈, 내장을 만들거나 신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용도로 이용됩니다. 오랫동안 소고기는 육중한 단백질의 무게감을 즐기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18세기에 영국인들은 여기에 새로운 맛을 더합니다. 이 무렵 영국인들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오가는 무역에 뛰어들면서 가파른 경제 성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해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던 이들이 자신들의 힘을 확인하는 방편으로 택했던 것 역시 소고기를 즐기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들은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단백질의 맛 외에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의 맛 또한 추가하길 원했습니다. 바로 ‘지방의 맛’입니다. 이것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사이에 영국에서 유행했던 소의 그림입니다. 몸이 거의 직사각형인데요.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종전보다 더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는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소는 점점 더 크고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에게서 얻은 고기는 붉은 살코기 사이사이에 하얀 지방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는 점에서 이전까지의 소고기와는 확연하게 구별되었죠. 마치 대리석 무늬 같다고 해서 이를 ‘마블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방은 단백질 음식이었던 소고기에 새롭게 추가된 풍요의 맛이었고 영국인의 취향이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마블링은 소고기를 즐기는 새로운 기준으로 거듭났습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그렇죠.
지속가능성
최근 들어 소고기의 맛은 다시 한 번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문제가 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모든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는데요. 소고기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소고기를 만들려는 노력은 어떤 식으로든 소고기 맛을 변화시킬 겁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배출되고 있는 온실가스 중 약 3분의 1은 식량 시스템에서 나옵니다. 주로 농지를 조성하기 위해 산을 개간하면서 토양이나 초목에 묶여 있던 탄소가 공기중으로 풀리고요. 작물을 수확하거나 운송하는 모든 단계에서 화석연료를 태워 움직이는 기계를 사용하기 때문에 또 다시 탄소가 배출되죠. 또 시설에서 작물이나 가축을 기를 경우 급수기나 사료 공급기 같은 자동화 설비들을 움직이는 데에도 화석연료가 간접적으로 투입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석연료 대신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전기를 생산함으로써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는 돼지나 닭과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돼지나 닭은 인간처럼 위가 하나이기 때문에 풀을 소화할 수 없고 그래서 대부분 곡물 사료를 줄 수밖에 없는데요. 이에 비해 ‘업사이클러’인 소는 풀을 먹여도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전 세계 개발도상국에서 소는 경작이 어려운 땅에서 풀을 뜯으며 사육되고 있고 일부 예외는 있지만 축산업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도 풀 사료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가령 축산업 강국인 미국에서 소는 일생의 대부분을 목초지나 방목지에서 풀을 뜯으며 자랍니다. 소가 일생 동안 먹는 사료들 중 옥수수 같은 작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10%도 안 되죠. 2022년 11월, 세계 인구는 80억 명을 돌파했습니다. 2050년이면 97억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죠. 이렇게 인구가 늘면서 식량 위기를 겪고 있는 인구 또한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점점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려면 작물 생산에 부적합한 땅에서도 식량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소는 우리에게 매력적인 기회를 제공합니다. 물론 소는 다름아닌 풀을 먹는 과정에서 온실가스를 배출합니다. 소의 첫 번째 위 속에 들어있는 미생물이 풀을 발효시킬 때 온실가스 중 하나인 메탄이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이 메탄은 주로 트림의 형태로 공기중에 배출되죠. 그래서 돼지나 닭과 달리 소의 지속가능성은 이 메탄 배출을 줄이는 데 방점이 찍혀 있고 오늘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들이 많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최근 유망하게 제시되고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해초를 보충사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2021년 캘리포니아주립대 연구진은 해초의 일종인 ‘바다고리풀’을 소에게 먹임으로써 메탄 배출을 최대 82퍼센트까지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습니다. 그러면서 연구진은 바다고리풀이 소고기 산업을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게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제시합니다. 소 한 마리가 배출하는 메탄의 양을 줄이는 것도 중요한 과제지만 애초에 메탄을 배출하는 소의 수 자체를 줄이는 것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사육하는 소의 수는 1975년 1억 3200만 마리로 정점을 찍은 뒤 줄곧 하락해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소고기 생산량은 전혀 줄지 않고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죠. 품종 개량과 사육기술 개발로 소 한 마리가 생산하는 고기의 양을 크게 늘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미국산 소고기가 세계에서 가장 탄소발자국이 낮은 소고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데에는 이처럼 사육하는 소의 수를 크게 줄인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어떤 시대의 사람들이 어떤 소고기를 좋아하는지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지곤 합니다. 그리고 지속가능성이 시대정신이 된 오늘날 소고기는 생산 과정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식량 위기에 맞서 핵심적 역할을 해야 하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과제들을 해결한 소고기는 이전까지와는 또 다른 맛에 가닿을지도 모르죠. ‘지속가능성’은 지난 시대의 ‘마블링’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소고기를 즐기는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