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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의 기원과 발전

by 팔딴 2023. 6. 17.

2019년 기준 국내 외식업체 수는 약 66만 개 입니다. 이중 가장 오래된 곳은 어디일까요? 1902년 서울 종로에 문을 연 이문설농탕인데요. 20세기는 초는 한국에서 근대 외식업이 시작되던 시대였습니다. 그중 가장 인기 있었던 메뉴가 바로 설렁탕이었죠. 설렁탕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완성되었을까요?

 

1. 설렁탕의 탄생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선농탕 기원설입니다. 선농은 인간에게 농사를 처음 가르쳤다는 고대 중국신화 속 인물인데요.

선농제

때문에 역대 중국의 황제들은 선농에게 제사를 지내며 한 해 농사의 성공을 기원했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고려와 조선에도 선농제가 있었죠. 그리고 제사를 지낸 뒤에는 왕과 백성이 희생제물을 함께 나눠먹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신인공식(神人共食)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천명이 나눠먹어야 했다면 그 형태는 대체로 탕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설명엔 좀 석연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탕은 기본적으로 간장이나 된장을 풀어 만든 장국입니다. 그런데 설렁탕엔 장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직 소금으로만 간을 하죠. 이러한 차이 때문에 설렁탕이 외부에서 전래되었다는 설이 보다 힘을 얻고 있는데요. 몽골 기원설입니다 13세기에 파죽지세로 정복활동을 했던 몽골은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 양과 같은 가축을 직접 끌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끼니때가 되면 잡아 곡물가루와 같이 끓여먹기도 했죠. 이 국과 죽 사이의 음식을 ‘슐렝’이라고 했습니다. 13세기 고려가 몽골의 지배를 받을 때 슐렝이 고려로 전해져 설렁이 되고 ‘국’을 의미하는 접미사 ‘탕’이 붙어 설렁탕이 되었다는 겁니다. 설렁탕이 토착화되면서 들어가는 고기도 유목민의 음식인 양고기에서 농경민의 음식인 소고기로 바뀌었다는 거죠.

 

2. 국밥집

그렇다면 설렁탕이 외식메뉴로 떠오른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농업을 기간산업으로 했던 조선시대 소는 농사일을 도와주는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소를 죽이는 건 엄격히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농민들에게 한정된 이야기였고 왕과 양반은 ‘조상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 ‘학업과 국정에 힘써야 한다’ 등등의 이유로 끊임없이 소를 잡아먹었습니다. 때문에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소 사육두수는 꾸준히 늘어났죠. 15세기 3만 마리였던 소는 16세기에 40만 마리가 되고 7세기에 이르러 더욱 급증 100만 마리가 되었습니다.

소고기를 먹는 양반들

그리고 18세기의 실학자 박제가는 당시 조선에서 매일 5백마리의 소가 도축되고 있었다고 전하죠. 이렇게 많은 양의 소고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었던 것은 당시 주막의 발달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막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원래는 천막을 두른 간이시설이었습니다. 전국 각지를 오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술과 안주를 간단히 팔던 곳이죠.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숙박을 겸하는 업소가 됩니다. 주막에서 팔던 안주는 다양했습니다. 원래는 김치나 나물, 자반 정도로 소박했지만 점차 개고기나 소고기를 푹 고아서 만든 장국도 나왔죠. 사람들은 장국에 밥을 말아 각종 나물과 산적을 얹어서 먹었는데요. 이 음식이 바로 장국밥입니다. 청계천 인근에 있던 무교탕반이라는 장국밥집은 당시 왕이었던 헌종조차 변복하고 자주 드나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하죠. 소를 도축해 왕과 양반들이 살코기를 먹고 주막에서 장국밥을 만들고 그럼 남은 부산물은 어떻게 했을까요? 선짓국이나 설렁탕을 끓였을 겁니다. 19세기 말 조선의 도축업자였던 백정들은 한강 이남의 물자가 모이던 잠배나 마포, 종로 등에 정육점과 국밥집을 함께 운영했는데요. 정육점에선 살코기처럼 수요가 많은 부위를 팔았고 국밥집에선 팔고 남은 부산물로 설렁탕을 끓여서 팔았죠.

 

3. 조선음식계의 패왕

하지만 19세기의 설렁탕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파나 밀국수(소면)도 들어가지 않았고 달달한 깍두기도 없었죠. 이런 요소들은 언제 추가되었을까요? 일제강점기였던 20세기 초반 설렁탕의 전성시대가 찾아옵니다. 1920년만 해도 서울에 설렁탕집은 25곳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4년 뒤 그 수는 100곳으로 급격하게 늘어났죠. 왤까요? 첫 번째 요인은 서울 인구의 급증이었습니다. 1914년 18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1925년 24만 명으로 확 늘었죠. 1920년 조선인의 회사 설립을 막았던 회사령이 철폐되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는데요. 이후 경성방직주식회사처럼 조선인이 세운 기업들이 설립되면서 노동자들이 서울로 몰려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공급의 증가가 있었습니다. 1904년 이후 일본은 자국 군대에 배급할 소고기 통조림을 만들기 위해 조선에서 소를 적극적으로 수입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진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때문에 수출용 소의 사육이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통조림을 만들고 남은 엄청난 양의 소 부산물이 서울로 흘러들었고 이는 설렁탕집의 급증을 불러왔죠. 그런데 설렁탕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한 끼 식사인 동시에 상류층이 집으로 배달시켜 먹는 음식이기도 했는데요. 1895년 이후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곤 하지만 신분의식은 여전히 사람들의 의식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소위 양반들이란 사람들에겐 설렁탕집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먹는 건 품위가 떨어지는 일로 여겨졌죠. 이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로 설렁탕을 집으로 배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목판에 담은 설렁탕 그릇을 어깨에 멘 채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는 배달부 당시 서울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설렁탕 하면 빠질 수 없는 파 고명과 달달한 깍두기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당시 설렁탕은 안 팔리는 부위를 다 넣고 끓인 것이다보니 누린내가 꽤 심한 편이었습니다. 이 설렁탕을 사람들에게 팔려면 누린내를 없애야 했는데요. 설렁탕집 요리사들이 주목한 건 조선에 들어와 있던 중국인 요리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파를 이용해 고기의 누린내를 잡고 있었죠. 한편 1920년대 중반부터는 설탕이 일본에서 수입되기 시작했는데요. 이와 함께 음식에 설탕을 넣는 문화가 시작되었고 설탕에 무를 절인 달달한 깍두기가 탄생했습니다.

 

4. 설렁탕의 완성

해방 이후에도 설렁탕은 전히 주요 외식메뉴였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 서울의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설렁탕은 또 한 번 변화를 겪습니다. 바로 밀국수의 추가입니다. 박정희 정부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혼분식 장려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당시 미국이 밀가루를 무상으로 원조하면서 밀가루가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밀가루 제분

정부로서는 부족한 쌀 대신 풍족한 밀의 소비를 늘릴 필요가 있었죠. 정부 정책 기조에 발맞춰 쌀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설렁탕에 밀국수가 추가된 게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하얀 우윳빛깔의 국물과 파 고명 달달한 깍두기 밀국수 설렁탕은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