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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by 팔딴 2023. 6. 8.

농업사회인 조선에서는 농사나 물자를 나르기 위한 수단으로 주로 소를 이용하였습니다. (출처: 유튜브 Youtube, 채널 '아이오 IO')

1392년부터 한반도와 그 부속국가를 다스렸던 나라, 조선. 농업사회였었던 조선에서 소는 식량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소는 열 사람 이상이 매달려야 간신히 할 수 있는 일들을 혼자서도 너끈히 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때나 물자를 나를 때 유용하게 이용되었죠. 그래서 모두들 소의 개체수를 늘리는 데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15세기에 30만 마리 정도였던 조선의 소 사육두수는 17세기 말까지 100만 마리로 큰 폭의 성장을 이뤘죠. 이처럼 소의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조선인들은 소고기 맛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국가 차원에서는 핵심 자원인 소의 개체수를 유지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소를 함부로 도살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는데요. 그렇다 해도 소가 다쳐서 일을 할 수 없다거나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면 그런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죠. 그래서 이를 이용해 소를 잡을 핑계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조선에서 소고기는 합법과 불법 사이, 그 어디쯤에서 먹는 음식이었고 그래서 더욱 탐식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인이라면 모두 어느 정도씩은 소고기에 미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리고 바로 이 소고기 사랑으로부터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불고기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 간장 양념

조선인들은 소고기를 어떻게 먹었을까요? 불고기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볼 조리법은 소육(燒肉)입니다. 불사를 소에 고기 육불에 구운  고기, 즉 고기구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는데요. 불고기의 어원으로 여겨지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소육이라는 장르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물에 삶았다가 굽는 것부터 생고기에 그냥 소금만 뿌려서 구운 것까지 매우 다양했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고급으로 여겨진 것은 양념구이 였습니다. 과거 조선인들이 먹었던 소고기는 애초에 고기를 얻을 목적으로 길러진 게 아니어서 육질이 질겼고 좋지 못한 냄새도 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육질 좀 더 부드럽게 만들고 냄새도 가리려면 간장이나 참기름, 마늘, 생강처럼 맛과 향이 강한 재료로 만든 양념에 고기를 재워야 했습니다.

18세기 초 집필된 산림경제에 간장양념에 고기를 재는 방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처: 유튜브 Youtube, 채널 '아이오 IO')

그래서 가장 고급에 해당하는 소육은 양념구이의 형태였고 이 양념구이는 불고기 조리법의 원류로 여겨집니다. 17세기 이후 조선에서 철의 생산량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철로 만든 석쇠는 대나무로 만든 꼬챙이를 서서히 대체해나갔지만 조선의 소육은 아직 불고기가 아니었습니다. 소육이 불고기가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하나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설탕입니다.

 

2. 문명의 맛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는 기원전 8,000년경 뉴기니에서 처음 재배되었습니다. 이후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들을 거쳐 인도의 벵골까지 전파되었고 이곳에서 기원전 500년경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드는 기술이 최초로 발전했죠.

설탕기술의 발전 과정
(출처: 유튜브 Youtube, 채널 '아이오 IO')

설탕이 선사하는 강렬한 단맛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사탕수수는 끊임없이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나갔습니다. 사탕수수 재배지는 서(西)로는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를 거쳐 지중해 세계까지 전파되었고 동(東)으로는 푸젠이나 광둥 등 중화 세계의 남부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완전히 사정이 달랐습니다. 조선은 온대기후에 속했기 때문에 열대작물인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없었고 오직 수입을 통해서만 설탕을 얻을 수 있어 상류층은 물론이고 왕조차도 쉽게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설탕이 매우 귀했죠. 그래서 조선에서 설탕은 귀한 약재로나 이용되었지 음식에 맛을 더하는 재료로 이용되진 않았습니다. 앞서 소육의 사례에서 보듯 조선의 맛은 설탕이 아니라 간장에 그 핵심이 있었죠. 입맛은 우리가 가진 취향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누적되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려운데요. 하지만 낯선 맛이라고 해도, 특정 시대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하면 그 맛에 서서히 길들여지기도 합니다. 19세기 말 조선에서 설탕이 딱 그랬습니다. 이 무렵 조선은 영국이나 미국 등 서양 국가들과 접촉을 확대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죠. 이전까지 조선인들에게 있어 문명의 중심은 곧 중화였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에 중화제국인 청이 서양 국가들에게 얻어맞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인식에도 균열이 생겼죠. 게다가 조선보다 앞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조선 또한 일본처럼 서양을 문명의 중심으로 놓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개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했습니다. 이것을 문명개화론이라고 합니다. 문명개화론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서양 국가들이 비서양 국가들을 압도하는 힘을 갖게 된 것은 그 나라의 국민들이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고 그러한 신체와 정신은 영양가 높은 음식을 섭취하는 데서 온다고요. 그러면서 핵심으로 지목했던 것이 바로 설탕이었죠. 당시 서양에서 설탕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고 있었고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열량을 공급하는 일종의 포션(portion)으로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은 일을 하다가 힘이 들면 티타임을 가지면서 설탕을 듬뿍 넣은 차를 마셨습니다. 설탕의 높은 칼로리가 노동자들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를 제공했죠. 조선의 문명개화론자들의 눈에는 설탕이 노동자들을 근면성실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였고 그래서 설탕은 서양의 힘을 만든 원천으로 여겨졌습니다. 문명개화론자들은 조선도 서양처럼 설탕을 일상적으로 먹어야 문명개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죠. 이러한 주장은 1910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더욱 탄력을 받습니다. 일본은 19세기 말에 타이완을 식민화한 뒤 이곳을 중심으로 설탕 산업을 육성했는데요. 20세기 초에 조선을 식민화할 때쯤이면 이미 타이완산 설탕이 일본으로 흘러들면서 설탕의 자급을 달성한 상태였습니다. 이는 자칭 식문화의 문명개화로 이어졌죠. 설탕이 듬뿍 들어간 빵이나 과자, 빙수 같은 음식들이 생산되면서 일본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이런 음식들이 조선에도 소개되면서 조선의 대중으로 하여금 설탕에 익숙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단맛과는 거리가 멀었던 조선의 음식이 점점 달아지기 시작합니다. 1910년대와 20년대 사이에 조선에서 출판된 요리책에는 설탕이 들어간 음식의 비율이 겨우 5퍼센트 남짓이었지만, 1940년대가 되면 이 비율이 32퍼센트까지 급증합니다. 너무나 가파른 변화여서요. 설탕이 전통음식의 맥을 다 끊어놓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나올 정도였습니다.

 

3. 불고기의 탄생

20세기 초 한반도의 음식 문화는 큰 균열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균열이 불고기의 출현을 낳습니다. 1939년 출간된 잡지 《모던일본》에는 조선을 여행했던 일본인들이 개성의 한 선술집에서 먹었던 고기구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흥미롭게도 이 무렵 개성에서는 고기를 간장 베이스의 양념에 재우는 게 아니라 다름아닌 설탕에 찍어서 구운 고기구이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소육이 이른바 문명의 맛을 입고 있었죠. 이러한 변화는 같은 시기 〈동아일보〉 지면에서도 확인됩니다. 너비아니라는 이름으로 실린 이 양념구이 레시피에는 전통적으로 이용되던 재료인 간장이나 참기름과 함께 설탕이 들어가 있죠. 조선의 양념구이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 전통과도 어느 정도 결별한, 새로운 형태의 양념구이였습니다. 한반도 양념구이에 발생한 균열은 간장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너비아니 레시피에는 간장이 그냥 간장이 아니라 진간장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요. 진간장은 일본식 간장을 말합니다. 원래 조선에서는 대두로 만든 메주에 소금물을 붓고 발효시켜서 간장을 만들었다면 일본의 간장은 밀이나 보리 같은 곡물이 대두와 같은 비율로 들어갔기 때문에 좀 더 단맛이 돌았습니다. 어쩌면 좀 더 달다는 사실이 일본식 간장을 조선식 간장보다 좀 더 문명화된 것으로 여겨지게 했을지도 모르죠.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의 경험은 진간장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양념구이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한반도의 역사에서도 그리고 한반도 고기구이의 역사에서도 거대한 균열을 만든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의 식민통치가 끝나고 마침내 이 균열이 봉합되었을 때 거기에는 불고기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양념한 고기구이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은 불고기가 아니라 너비아니였습니다. 불고기라는 단어 자체는 1930년대 초부터 여러 문헌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다만 이때는 명확하게 양념구이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소육이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고기구이를 아우르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었죠. 그런데 60년대 들어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산업화를 막 시작하면서 전통적으로 선호되던 음식인 소고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요. 하지만 축산업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에 있어서 고기를 얻을 목적으로 사육되는 소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고 농촌에서도 소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농사가 시작되는 5월 이후로는 우시장에 소를 내놓는 일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5월만 되면 소고기값이 엄청나게 뛰는 사태가 반복되었죠. 60년대 내내 이어졌던 소고기값 폭등은 한국인들이 소고기를 이용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주었습니다. 원래 구이용으로 이용되었던 재료는 등심이나 안심처럼 육질이 연한 부위입니다. 그런데 소고기값이 너무 비싸지자 한국인들은 좀 더 싼 부위들, 그러니까 목심이나 앞다리, 우둔, 설도처럼 좀 더 질겨서 구이용으로는 이용되지 않던 부위를 구이용으로 이용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죠. 이런 부위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육절기로 고기를 매우 얇게 썰면서 이른바 불고기용 소고기라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한국인들은 이 불고기용 소고기를 너비아니 양념에 재웠고 너비아니를 구울 때처럼 석쇠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너비아니와 닮은 듯 닮지 않았던 이 고기구이를 가리키는 말로 불고기가 사용되면서 보통명사였던 불고기는 점점 고유명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전골의 재발견이 진행되었습니다. 조선시대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전골 불판은 이렇게 가운데가 오목한 모양인데요. 그래서 조선인들은 가장자리에 고기를 구웠고 고기에서 새어나온 육즙이 가운데로 모이면 장국을 붓고 미나리 등 갖은 채소를 넣어서 국을 끓였죠. 이 불판은 조선의 무관들이 쓰던 모자인 전립을 닮았다고 해서 전립골이라고 불렸는데요. 19세기에 이르러 이 말은 더 축약되어 전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골은 고기구이와 채소국이 결합된 이 음식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죠. 그런데 1960년대의 한국인들은 이 전골 불판을 거꾸로 뒤집어서 이른바 불고기용 불판을 개발했습니다. 가운데에는 너비아니 양념에 재운 불고기용 소고기를 올려놓고요. 고기에서 육즙이 빠져나와 가장자리에 고이면 여기에 장국을 붓고 당면이나 채소, 버섯 같은 것을 넣어서 끓였습니다. 이렇게 불고기를 전골 형태로 만들면 국물과 부재료로 양을 불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석쇠구이 형태에 비해 가성비가 높은 대안이 되었죠. 그 결과 빠르게 대중화되어 불고기라는 음식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축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불고기는 명백히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입니다. 하지만 그 내력은 좀 복잡합니다. 소고기라면 환장했던 조선의 양념구이를 원류로 하면서도 19세기 말 서양 국가들과의 접촉 20세기 초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 20세기 중반 한국의 소고기값 폭등이 겹쳐지며 다양하게 변주되었고 마침내 여기까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