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보험의 개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by 팔딴 2023. 7. 11.

"20의 3배에 6을 더한 해(=66년) 런던은 불타 정의로운 자의 피를 요구하리라." 유명한 예언가인 노스트라다무스가 남긴 이 말은 그가 죽고 100년이 흐른 뒤 정말로 실현되었습니다. 1666년 런던. 한 빵집에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주변 건물로 옮겨붙으며 빠르게 번져나갔고, 나흘간 시내 건물 85%를 태워버렸습니다. 런던 대화재입니다. 이 화재로 1만 3천 채 이상의 집이 불탔고 무려 10만 명이 노숙자 신세가 됐죠. 불길이 잡힌 뒤 런던 시민들은 무너진 건물을 복구하는 작업을 서둘렀습니다. 하지만 무너진 마음에도 복구는 필요했죠. 언제 또 비슷한 화재가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으니까요. 이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진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 위험과 마주합니다.

 

보험의 등장

우리 잘못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그 순간의 예측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해 위험이 발생하기도 하니까요. 그건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먼 길을 떠나면 강도를 만나기 쉬웠고, 종종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되기도 했죠. 이렇듯 위험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했고 우리는 위험이 정말 닥칠 때를 대비하기 위해 ‘보험’이라는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보험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바빌로니아의 상인들은 방대한 지역을 연결하고 무역 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먼 거리를 오가는 것은 위험이 따랐기 때문에 행상을 고용해 대신 여행하게 하기도 했죠. 만약 행상이 실수로 상인의 재산을 잃어버리거나 훼손했다면 물어줘야 했지만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위험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행상이 피해를 배상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가 바빌로니아에는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보험입니다.

 

지중해

보험이 제도를 넘어 개인 간에 체결되는 계약의 형태로 발전한 건 14세기 지중해에서였습니다. 당시 지중해는 아라곤이나 제노바, 베네치아 같은 몇몇 나라를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는데요. 무역의 규모나 횟수가 늘수록 해상사고의 빈도도 늘어났기 때문에, 이 위험을 대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죠.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험상품을 판매하는 전문 보험업자가 등장합니다. 가령 15세기 후반에 아라곤 바르셀로나의 한 외과의사는 항해를 떠나기 전에 그의 노예였던 마리아에 대한 생명보험을 듭니다. 당시 임신 5개월차였던 마리아가 항해 중 죽거나 항해가 끝나고 8일 이내에 죽는다면 보험업자가 50파운드를 지급한다는 내용이었죠. 대신 외과의사는 매달 4파운드를 냈습니다. 오늘날의 보험상품의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런 보험계약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보다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고 그래서 위험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보험에 들어야 할 절실한 필요는 없었죠.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던 런던 대화재는 일상을 살아가던 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험에 노출시켰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었습니다.

 

위험사회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사회가 진보하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위험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크고 완전히 새로운 위험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이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이야말로 근대적인 현상이라면서, 근대사회를 가리켜 ‘위험사회’라고 정의했죠. 런던 대화재가 일어났던 17세기 중반은 영국이 초기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며 근대사회로 막 진입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경제가 빠른 성장세를 보이면서 농촌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하고 있었고 런던 같은 도시는 갑자기 불어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들어서고 있었죠. 게다가 이 집들은 나무로 지어졌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 불이 나면 순식간에 옮겨붙을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등장과 급속한 도시화가 런던대화재를 낳았던 셈입니다. 런던대화재는 위험사회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발생한 첫 번째 위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또 다가올지 모르는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보험의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게 바로 이때부터였죠.

 

대중화

1680년 런던에는 최초의 화재보험 회사가 설립되어 화재보험 상품을 판매했고, 이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자 곧 비슷한 보험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머잖아 위험사회의 또 다른 위험들에 대응하는 보험상품들도 수없이 등장했죠. 가령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내연기관) 자동차는 우리에게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이동성을 주었지만 ‘자동차 사고’라는 새로운 위험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자동차 보험이 등장했죠. 또 의학과 보건학의 발달은 20세기 내내 인류의 평균 수명을 크게 늘렸지만, ‘암 발병률 증가’라는 새로운 위험 또한 발생시켰습니다. 암은 누구나 오래 살기만 하면 발병 확률이 커지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암 보험이 등장했죠. 위험이 대중화된 시대에는 보험 또한 대중화되었습니다.

 

인슈어테크

그런데요. 런던 대화재가 열어젖힌 보험의 대중화 시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보험에 등장하는 위험들이 다양해지고, 여러가지 요소들이 가미되어 훨씬 복잡해지면서 보험은 개인이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려워졌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보험소비자들이 보장이 충분치 않은 상품에 가입하거나, 비슷한 상품을 여러 개 가입하는 바람에 나중에 보험금을 청구할 때 분쟁이 발생하는 일이 잦아졌죠. 보험이 분명 필요하기는 한데, 잘 못 믿겠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보험에 기술을 결합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점점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걸 ‘인슈어테크’라고 합니다. 보험을 뜻하는 ‘인슈어런스’와 기술을 뜻하는 ‘테크놀로지’의 합성어죠. 예를 들어 ‘시그널플래너’라는 앱이 있는데요. 이 앱은 소비자가 가입한 보험상품 내역과 보험금 납입 상태를 한 눈에 정리해 보여주고요. 현재 가입해 있는 보험들의 보장내역이 중복되진 않는지, 연령 대비 보장이 지나치게 과한 건 아닌지 등을 분석해 보고서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 보고서를 읽고 궁금한 게 생기면 보험설계사와 카카오톡으로 상담을 진행할 수 있게 해서요. 소비자는 불필요한 보험을 걸러내는 법이나 보험료를 아끼는 노하우 같은 것을 직접 물어보고, 내게 꼭 맞는 보험상품을 추천받을 수도 있죠. 그간 보험상담에 자주 이용되었던 전화가 아니라 문자를 이용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스스로 원할 때 상담을 시작하거나 그만둘 수 있고 상담 내용이 모두 저장되어서 두고두고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특징적입니다. 누구나 갖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미덥지 못한 것이 바로 보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슈어테크는 보험이 기술을 만났을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 수 있는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기서 더 나아가 보험 자체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가령 우리가 스마트워치로 우리 몸의 건강정보를 분석해 보험회사로 보내면, 보험회사가 개발한 챗봇은 우리에게 식단이나 생활습관에 관한 조언을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마트폰 카메라로 어떤 시설을 촬영해서 보험회사로 보내면, 보험회사의 인공지능이 그걸 분석해 미리 수리하도록 권유할 수도 있고요. 위험을 대비하고, 위험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기능을 했던 보험이 이제는 위험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는 기능까지 할 수 있는 겁니다. 런던대화재가 발생하기 100년 전에 그것을 예언했던 노스트라다무스처럼 말이죠. 오랫동안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왔던 보험은, ‘대중화’라는 이름의 챕터를 마무리짓고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