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왜 와인을 마셨을까?
위 그림은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플라우틸라 넬리의 그림인 <최후의 만찬>입니다. 기독교에서 메시아로 숭배받는 남자, 예수가 기원 후 30년 경 마지막으로 가졌던 만찬을 묘사하고 있죠. 이때 이들이 먹었던 음식에 대해 정확히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빵과 와인을 먹고 마셨다는 사실만은 이미 너무나 유명한데요. 복음사가인 요한 마르코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예수가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건네자 제자들은 잔을 돌려가며 마셨다. 그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해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왜 하필 와인을 마셨을까요?
인류의 발견, 발효.
고대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술 중에는 맥주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약 2만 년 전 프랑스의 로셀 절벽에 새겨진 '로셀의 비너스'에는 긴 머리의 여성이 뿔 같은 무엇인가를 들고 있습니다. 이 긴 머리 여성이 들고 있는 것을 많은 학자들은 '뿔잔'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정말 뿔잔이 맞다면 잔에 담았던 것은 무엇일까요? 혹시 술은 아니었을까요? 터무니없는 상상은 아닌 것 후대 사람들도 이러한 뿔잔 모양의 용기에 술을 담아 마신 기록들이 있고, 또 술은 인류가 존재하기 전부터 자연에서 존재했던 흔한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술을 만들어내는 주역은 '효모'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미생물입니다. 효모가 가장 좋아하는 환경은 수분과 당분이 많은 곳인데요. 말하자면 설탕물 속을 헤엄치면서 효모는 당분을 먹고 이산화탄소와 알코올을 배출합니다. 이 현상을 '발효'라고 말하고 발효가 완료된 설탕물을 '술'이라고 합니다. 자연 속에서 당분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것은 '과일'과 '벌꿀'입니다. 과일이 너무 익어버리거나 비가 내려 벌집에 물이 고이면 효모가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이 만들어졌죠. 따라서 과일과 벌꿀은 자연 속에서도 쉽게 발효되었고 과일과 꿀을 먹는 동물에게 알코올을 정기적으로 섭취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수백만 년 동안 과일을 주식으로 삼았던 우리의 조상들에게도 마찬가지였죠. 오늘 우리가 알코올을, 그러니까 술을 좋아하는 것은 과일을 좋아했던 지난날과 관련이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직접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아마도 인류의 조상들이 살았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무화과나 바오밥열매 등을 이용해 술을 빚지 않았을까 싶지만 너무 오랜 옛날이라 고고학적 증거는 다소 부족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증거는 아시아의 동서 양편에서 다소 비슷한 시기에 나타나고 있는데요. 이곳 자후(Jiahu)에서는 약 9천 년 전에 벌꿀과 포도, 그리고 쌀로 술을 담갔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서쪽의 하지 피루즈(Hajji Firuz)와 고딘 테페(Gordin Tepe)에서는 각각 7400년과 5000년 전 벌꿀과 포도, 보리로 술을 담갔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꼭 이것들이 아니어도 당분만 있다면 발효는 일어날 수 있어서 그 이후로도 인류는 밀이나 기장 같은 곡물, 살구나 사과, 커피체리, 바나나 같은 과일 대나무나 대추야자의 수액 등을 이용해서도 끊임없이 독창적인 술을 빚어왔습니다. 각자가 사는 지역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한 결과였죠. 초원에 살던 유목민들은 말젖이나 소젖을 발효시켜 술을 빚었습니다. 젖에도 젖당이 들어있으니까요. 이 술은 오늘날 터키어 쿠미스(kumyz), 러시아어 케피르(kefir), 카자흐어 크므스(kymyz), 몽골어 아이락(Airag) 등의 이름으로 유라시아 스텝을 따라 분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재료를 이용해서 만들었든 술을 마시면 취하기가 매한가지입니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어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은 고대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고, 고대인들은 술에 취하는 느낌을 신과 관련지어 해석했습니다. 따라서 술은 신과 접촉하는 의식을 치를 때 반드시 따라오는 음료였죠. 보통 이 의식을 주재하는 자가 술을 마실 권리를 독점했고 일반인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술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약 6000년 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일대 그리고 약 4500년 전 양쯔강과 황허 강 일대에서는 강 주변의 광활한 땅을 경작, 곡물을 대량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즈음부터 인류는 문명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강 주면에서 대량생산한 곡물로 대량의 술을 빚으면서 신관층에 의한 술 독점이 무너지고 술의 대중화가 진전되었죠.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요. 두 문명사회에서 각각 자신들의 곡물주를 가리켰던 문자가 모두 바닥이 뾰족한 술병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곡물주들은 발효를 마친 뒤 곡물주에서 맑은 부분만을 취한 겁니다. 하지만 모든 곡물주는 발효를 막 마쳤을 때 술 표면에 효모나 낟알껍지들이 섞여 매우 혼탁한 상태입니다. 때문에 고대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면 빨대를 술 표면 아래로 꽂아 찌꺼기를 피해 액체만 빨아 마셨고 점점 가라앉는 찌꺼기들이 한 곳에 모이도록 술병의 바닥을 뾰족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중이 일상적으로 마시는 술이다 보니 수고스럽게 찌꺼기를 거르기보다는 가장 덜 귀찮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던 것일 겁니다. 오늘날에도 라오스의 곡물주인 라오하이(Lao hai), 우간다의 곡물주인 말와(Malwa)에서도 이 흔적을 찾아볼 수 있죠. 하지만 어느 한편에서의 대중화가 다른 한편에서의 차별화를 촉발한다는 것은 거의 역사의 법칙과도 같은데요. 술의 대중화가 진전된 뒤에도 특정 계급이 독점하는 술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중의 술과 엄격히 구별되기 시작했죠. 황허 강 일대에서 '쥬에'라고 불렸던 한 술잔에는 '창'이라는 이름의 술이 담겨있었습니다. 창은 기장으로 발효하고 울금으로 빛깔과 향을 더했던 고급술이었고 하늘의 신께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되었습니다.
와인의 발견, 포도
비슷한 일은 서쪽에서도 있었습니다. 티크리스-유프라테스 강 일대에서는 보리로 빚은 맥주가 농부에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랑받았는데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포도로 만든 과일주가 신께 제사를 드리는 음료로 사용되면서 상류층의 음료로 점점 인기를 얻었습니다. 바로, 와인입니다. 수메르 사회에서 와인은 상류층이 즐기는 최고급 술이라는 점에서 맥주와 분명히 구별되었고 마실 때도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빨대로 빨기보다는 잔에 담아 단독으로 즐겼습니다. 그런데 왜 와인이 이렇게 특별취급을 받았던 걸까요? 포도나무는 기후와 토양을 많이 가립니다. 잘 자라는 땅과 그렇지 않은 땅이 있죠. 일반적으로는 언덕이나 구릉처럼 약간 경사진 곳에서 잘 자랍니다. 때문에 평야가 넓게 펼쳐진 수메르에서는 대부분의 포도를 북쪽과 동쪽의 산간 지역에서 수입해야 했고 이 포도는 수메르로 올 때쯤이면 갖가지 마진이 붙어 이미 비싼 상태였습니다. 포도로 밎은 와인도 마찬가지였고요. 어떠면 다른 이유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한 차례 시들어버렸던 포도가 선혈 같은 붉은색으로 되살아나는 광경은 마치 생명을 부여하는 신의 권능을 연상시켰을지도 모르죠. 소대 서아시아에서 활짝 꽃 피웠던 술 문화는 문명의 확장과 함께 동지중해 연안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수혜자는 바로 이집트였죠.
위의 그림은 기원전 1400년경 이집트에서 그려진 와인 제조 장면입니다. 포도를 수확하고, 발로 밟아 으깨고 포토즙을 추출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죠. 이 무렵 와인이 이집트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도 수메르와 마찬가지로 강 주변의 광활한 평야에서 곡물이 대량생산되고 있어서 대중의 술은 곡물로 만든 맥주였고 와인은 상류층의 음료로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도는 산과 구릉이 많은 그리스에 이르자 깨집니다. 그리스는 곡물을 재배할 땅이 많지 않았던 반면 포도나무는 잘 자랐기 때문에 와인이 신의 음료인 동시에 대중의 음료로 사랑받았고 맥주는 철저히 외면되었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 신화 속 '수확의 신' 디오니소스(Dionysus)입니다. 겨울에 한껏 말라붙었던 식물들이 매년 봄에 되살아나는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디오니소스도 매년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부활하는 신적 존재로 여겼는데요. 이 수확의 신이 들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와인'입니다. 어차피 그리스의 밭에서 수확되는 건 죄다 포도였으니까요. 때문에 그리스에서 와인은 신의 음료일 뿐 아니라 디오니소스 신의 피로 여겨지기도 했고 이 와인을 마시면 디오니소스가 가진 소생의 힘을 얻게 된다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지친 머리를 회복할 때든 지친 몸을 회복할 때든, 언제든지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와 페니키아는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와인에 어느 정도 진심이었던 사람들이라 이 경쟁은 지중해권에 와인 문화가 깊이 뿌리내리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 와인문화는 한 단계 도약의 기회를 맞습니다. 로마제국이 고대 세계의 포도밭을 석권한 데 이어 유럽 내부로도 영역을 확대하면서 와인 역시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포도나무로 만든 술'이라는 뜻의 라틴어 '비눔(Vinum)'으로부터 프랑스어 뱅(Vin), 독일어 바인(Wein), 영어 와인(Wine)이 파생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현대 유럽의 와인 문화에 로마 제국이 끼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죠. 그런데 이 무렵은 술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반전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 반전은 기원전 4년경, 제국의 동쪽 식민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유대인 남자아이로부터 시작됩니다. 그의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종교와 술
로마제국의 식민지 청년이었던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그도 목수가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그리 높지 않은 신분이었지만 그는 비유를 통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과 촌철살인으로 부조리를 고발하는 능력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죠. 이로 인해 예수가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되자 기득권층은 그를 위험 인물로 인식했고 어떻게 하면 붙잡아 죽일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약 30년경 그들을 결국 예수를 반역죄로 고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는 데 성공합니다. 처음에 보여드렸던 사진은 처형 전의 마지막 식사를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가 맥주가 아닌 와인을 곁들여 식사하고 잔을 들어 신께 감사하며 와인을 자신의 피라고 말했던 행동들에는 지난 6천 년 동안 차곡차곡 누적되었던 문화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최고신인 제우스의 아들이자 죽었다가 부활하는 신, 디오니소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피인 와인을 마셨던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가 그들이 믿었던 신 야훼의 아들이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피인 와인을 마셨습니다. 이들이 바로 초기 기독교도들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와인문화가 넓게 펼쳐진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380년, 기독교가 마침내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되면서 유럽과 와인, 기독교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얽히기 시작했죠. 로마제국은 5세기부터 7세기말까지 서유럽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서아시아에서의 지배권을 꾸준히 잃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들을 접수하며 지중해의 패권을 가져간 것은 7세기 초에 부상한 이슬람 제국이었죠.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술을 불결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때문에 고대에 가장 먼저 맥주와 와인을 만들고 술 문화를 꽃피웠던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술 문화가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와인과 맥주는 유럽에서 활로를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슬람 세계는 술의 역사에서 완전히 퇴장한 걸까요?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알코올을 추출할 수 있는 증류기가 발명되면서 술 문화와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