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파인 다이닝을 하러 레스토랑을 찾을 때 여러분은 왠지 주눅이 든 적 없으셨나요? 포크나 나이프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와인은 뭘 어떻게 주문해야 하는지 등 혹시 실수를 하지 않을까하는 걱정 때문인데요. 우리는 왜 레스토랑에 가면 주눅이 들까요? 레스토랑이라는 공간 자체가 수치심을 느끼도록 조직되었기 때문입니다. 아, 공간이라기보다는 음식이었죠. 바로 이 음식이요.
1. 미식 문화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비옥한 토지와 대서양과 지중해를 접하는 방대한 해안선 프랑스는 미식문화가 발달할 최적의 입지를 갖춘 곳입니다. 하지만 16세기까지만 해도 그 잠재력을 다 펼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여유가 좀 있는 상류층의 식탁조차 향신료를 듬뿍 뿌린, 맵고 자극적인 요리가 올라왔죠. 때문에 맛의 섬세한 차이를 즐기기는 어려웠습니다. 상상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매너 또한 없었습니다. 매너의 어원은 라틴어 마누아리우스(manuarius) 손을 의미하는 마누스(manus)와 방식을 의미하는 아리우스(arius)의 합성어입니다. 즉 매너란 손을 다루는 방식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우리는 흔히 프랑스식 식사 하면 포크로 고정하고 나이프로 써는 방식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이것은 일반적인 식사법이 아니었습니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프랑스인들은 누구나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었죠. 일단 포크는 이슬람교도들이 쓰는 도구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도들은 상당한 거부감을 가졌고 또 신께서 손가락이라는 완벽한 도구를 주셨는데 손가락 대신 포크를 쓰는 건 신성모독이라 여겼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이탈리아나 영국, 독일 같은 다른 서유럽 나라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죠. 프랑스 요리가 미식의 중심이 거듭나는 전환점은 의외로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찾아왔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나라들은 동방과 교역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는데요. 이를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를 발달시켰습니다. 이 시대를 르네상스 시대라고 합니다. 중세 유럽인들은 쾌락을 죄악시했던 반면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먹는 즐거움도 고결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향신료를 듬뿍 쳐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던 음식들 대신 맛의 섬세한 차이를 강조한 음식들이 식탁에 올라왔고 장엄하고 화려한 연회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먹을 때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하는 것처럼 오늘날 서양식 식사예절의 기본이 정립된 것도 이즈음입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또 상류층 간 교류도 활발했던 덕분에 르네상스의 유산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였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르네상스 거장 다 빈치를 초빙했고 그의 아들인 앙리 2세는 피렌체 지배계층의 딸 카테리나와 결혼했죠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의 미식문화가 프랑스 궁정에 이식되었습니다
2. 레스토레
프랑스의 미식문화는 17세기 말 절대왕정 시대에 완연히 꽃피웠습니다.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절대군주들은 사치스럽게 꾸민 베르사유 궁전에서무척 사치스러운 연회를 열었는데요. 사치가 새로운 미덕이 되었기 때문에 궁정사회는 점점 더 사치스러운 요리 점점 더 복잡한 테이블 매너를 발전시켰죠. 특히 이때까지도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었는데요. 따라서 포크의 사용은 귀족과 평민을 구별짓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치를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합니다. 왕과 귀족의 사치를 뒷받침했던 건 부르주아 계층의 재력이었습니다. 부르주아는 본래 성 안 살면서 상공업에 종사했던 이들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는데요. 16세기에 신항로가 개척되면서 이들은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고 이렇게 얻은 재력을 궁정사회에 제공하는 대신 관직을 얻어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하길 꿈꿨죠. 평민 출신인 부르주아 계층의 부상은 기득권층인 귀족들에겐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때문에 귀족들은 더 복잡하고 더 따라하기 어려운 매너를 발전시켜 이것을 자신들의 무기로 삼았죠.
궁정사회에 걸맞은 매너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 겁니다. 이것은 수많은 부르주아들을 좌절시켰고 또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 매너라는 게 단기간에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고 오랜 기간에 걸쳐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체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놀고 먹었던 귀족들과 달리 부르주아들에게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매너를 연습할 시간도 부족했죠. 무언가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때 사람들은 가치판단을 뒤바꿈으로써 그 수치심을 해소하곤 합니다. 귀족이 사치스러움과 매너를 과시했다면 부르주아는 그 대척점에서 검소함과 자제력을 과시하려 했습니다. 이를 통해 스스로를 귀족들과는 다른 동시에 평민들과도 다른 존재로 포지셔닝 하고자 했죠. 1760년대 파리에는 이런 부르주아 감성에 딱 맞는 가게가 등장했습니다. 이곳은 작고 독립된 테이블에 손님들을 앉혔고 좋은 품질의 고기를 잔뜩, 오래 끓인 수프를 내놨습니다. 이 음식의 이름이 바로 레스토랑입니다. 회복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동사 레스토레(restaure)에서 파생한 말인데요. 그러니까 레스토랑은 건강식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작명입니다. 이즈음 파리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레스토랑 가게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도자기 그릇에 뜨끈뜨끈한 레스토랑을 담아 내놨습니다. 먹고 배가 부를 정도로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값이 싸지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건 적당한 사치였습니다.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지도 지나치게 먹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부르주아들은 양보다 질을 강조하며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먹을 뿐이었죠. 그것은 음식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였고 이 태도가 상징하는 이 공간을 새롭게 지칭할 명칭도 필요했을 겁니다.'음식 이름'이었던 레스토랑은 그렇게 서서히 공간 이름이 되었습니다.
3. 수치심 장사
귀족과 부르주아 사이의 갈등은 1789년의 대혁명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왕과 귀족이 몰락하면서 부르주아는 가장 강력한 사회계층으로 떠올랐죠. 이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의복입니다. 귀족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검소함과 절제력을 과시할 수 있는 어떤 복장을 원했습니다. 때문에 귀족들이 입었던 화려한 색상의 의복 대신 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었고 넥타이 매는 기술처럼 자신들만의 복잡한 매너를 발전시켰죠. 말하자면 그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귀족을 창출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부르주아의 감성을 담은 공간 레스토랑도 이와 함께 비슷한 변화를 겪습니다. 귀족의 저택에서 일했던 요리사들은 대혁명 이후 귀족들이 몰락하면서 거리로 나와 개인 레스토랑을 차리는 일이 많았는데요. 때문에 레스토랑은 이전의 귀족 문화를 자연스럽게 흡수했습니다. 왕과 귀족들이 먹던 아주 사치스러운 고급요리가 레스토랑의 메뉴판에 추가되었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웨이터는 언제나 대기하고 있어 고객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것은 하인이 딸린 대저택에서 먹는 식사 경험을 부르주아식으로 재해석한 것이었죠. 물론 레스토랑은 여전히 관대한 제스처를 취합니다. 누구나 레스토랑에 들어올 수 있다고 돈만 있다면 말이죠. 그런데요, 19세기 이후 레스토랑에서 노동자들은 18세기 궁전에서 부르주아들이 느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재질의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복잡한 테이블매너와 말하기도 어려운 음식 이름들 사이에서 멈칫멈칫할 수밖에 없는 마음들 사이에서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미식문화는 대혁명 이후 부르주아의 레스토랑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부르주아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귀족이 되었듯 부르주아의 감성을 가득 담은 레스토랑도 수치심을 생산하고 선전하는 새로운 궁전이 되었죠. 조금은 더 관대한 그러나 조금은 더 교묘해진, 궁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