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라멘의 시작
일본 국수 하면 떠오르는 것. 바로 소바, 우동, 라멘도 빼놓을 수 없겠죠. 이중 가장 늦게 등장한 것은 라멘입니다. 라멘은 19세기말 중국에서 들어와 불과 100년 만에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일본인은 왜 라멘에 탐닉할까요? 19세기 말은 일본이 막 근대화를 시작하던 시대였습니다. 일본과 외국 사이에 여러 개의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일본으로 들어왔고, 그중에는 중국인도 있었죠. 요코하마, 고베, 나가사키 같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이 고향에서 먹던 국수를 만들거나 판 것이 오늘날 라멘의 시초가 되었는데요, 가장 많은 중국인이 살았던 요코하마에선 '난킹소바'라 불리던 국수가 있었습니다. 난킹(南京)은 중국 남부의 대도시의 이름이고 소바(そば)는 일본인들이 먹던 국수를 가리키죠. 난킹소바는 '중국식 국수'라는 뜻이죠. 난킹소바는 닭뼈를 우린 육수에 소금으로 약하게 간을 한 뒤 면을 말고 송송 썬 파를 올린 간단한 음식이었죠. 하지만 이전까지 일본인들이 먹던 우동이나 소바와는 분명히 다른 음식이었는데요. 일본식 간장인 쇼유 그리고 가쓰오부시로 국물을 낸 우동이나 소바와 달리 난킹소바는 고기국물을 사용했던 겁니다. 7세기 덴무 천황이 육식을 금지(일본서기, 675년)한 이후 일본은 무려 1200년 동안이나 육식을 하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때문에 고기를 이용한 음식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죠. 우동이나 소바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19세기말에 이르러 상황이 바뀝니다. 서양인과의 현격한 체격 차이를 목격한 일본인들은 생각합니다. 서양인이 육식 위주의 식단을 꾸렸던 것과 달리 일본인은 생선과 채소를 위주로 먹었기 때문에 왜소한 체형을 갖게 됐다고 말이죠. 1872년 메이지 천황은 육식금지령을 철폐했고 육식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고깃국물을 이용한 국수가 일본 사회에 등장하고 정착할 토대가 마련된 겁니다. 19세기말까지 난킹소바는 주로 차이나타운에 사는 중국인들이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이곳을 드나들던 일부 일본인들을 제외하면 일본인 중에 난킹소바를 먹어본 사람은 거의 없었죠. 요코하마에서 세관원으로 일했던 오자키 칸이치는 그 얼마 안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10년 그는 도쿄의 번화가 아사쿠사에서 '라이라이켄'이라는 중국음식점을 엽니다. 이 라이라이켄에서는 시나소바라는 국수를 판매했었는데요.
시나(支那)는 '중국'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시나소바도 난킹소바와 마찬가지로 '중국식 국수'를 의미하죠. 하지만 라이라이켄의 시나소바는 어딘가 달랐습니다. 중국 식재료인 멘마와 차슈를 토핑으로 올려 중국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육수에 쇼유를 섞어 일본인들에게 친근한 맛을 냈던 겁니다. 원래 소바 위에 올라가던 나루토를 라멘의 토핑으로 올리기도 했습니다. 시나소바는 중국식 국수에 뿌리를 두되 일본의 정체성을 가미한 국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라멘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나소바는 언제부터 라멘으로 불리게 되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확실한 설명은 없지만 1920년대 삿포로 일대에서는 '라멘'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1922년 삿포로에 문을 연 중국 음식점 '다케야 식당'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곳의 주방장이었던 산둥 출신 왕원차이는 국수 주문을 받을 때마다 "하오러"라고 했는데요. 이 말이 국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던 일본인 주인은 '하고러'의 '러'를 '라'로 듣고 '라멘(ラ-麵)'이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때문에 삿포로 일대에서는 라멘(ラーメン)이 중국식 국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었죠. 다른 설도 있는데요. 중국어 '라미엔(拉面)'에서 왔다는 겁니다. 라미엔은 산시를 비롯한 중국 북부에서 많이 만들던 면이었습니다. '라'는 '잡아 늘이다', '미엔'은 '면'이라는 뜻이죠. 즉 손으로 잡아당겨 늘인 면,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수타면'이 라미엔입니다. 때문에 이 설에 따르면 시나소바가 라멘이라고도 불린 건 면을 수타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었을 수도 있죠. 1930년대 초까지 라멘은 일본인의 일상 속에 서서히 스며들었습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1936년 영화 <외아들>을 보면 '차루메라'라는 피리소리가 들립니다. 당시 라멘 노점상들은 차루메라를 불면서 돌아다녔습니다. 때문에 이 소리를 들은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묻죠. "시나소바, 드셔본 적 있어요?" 그리곤 밖에 나가 라멘을 사서 돌아옵니다. 이처럼 라멘은 일본인의 일상과 아주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또 라멘 그릇을 산처럼 쌓아 올린 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배달부의 모습은 이 무렵 일본의 도시에서는 매우 흔한 풍경이었죠. 라멘의 인기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한풀 꺾이지만,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야심은 1945년의 패망으로 이어졌고, 전후 일본은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라멘의 인기가 부활하는 계기가 되죠. 미국 내에서 남아돌던 밀이 원조 형태로 들어오면서 라멘처럼 밀을 기반으로 한 음식들이 인기를 끌었던 겁니다. 1950년 옆동네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쟁특수라는 보약을 먹은 일본 경제는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라멘의 전성기
1955년 일본은 1인당 실질 GDP 성장률이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했고, 1960년대에는 고도 성장기로 진입했죠. 경제 성장은 라멘의 인기를 더욱 끌어올렸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공장이나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고, 식량 문제가 불거지게 됩니다. 노동자들을 먹일 빠르고 간단한 한 끼 식사가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영양'이 곧 '칼로리'를 의미하던 시절, 국물에 고기 기름을 녹여 만든 라멘은 최고의 영양식 대접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편 1958년에 처음 등장한 인스턴트 라멘은 라멘의 인기를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인스턴트 라멘은 빈약한 조리 환경에서도 꽤 괜찮은 라멘을 만들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1960년대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되죠. 일본이 전후 가난했던 시대를 딛고 일어나 경제적 황금기를 맞이했을 때 그들 곁에는 라멘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시대를 통과했던 일본인에게 라멘은 '좋았던 시절'에 대한 하나의 각인으로 남아 있죠. 그렇게 라멘은 조금씩 특별한 음식이 되어갔습니다. 1980년대부터 라멘은 미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라멘의 국물맛과 면의 쫀득함에 대해 토핑의 적절함을 놓고 토론했고 이 토론들은 대개 하나의 질문으로 향했죠. '진짜 라멘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함축하기 마련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 정신인데요. 모노즈쿠리는 '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라멘 요리사들은 '진짜 라멘'을 만들기 위한 수행을 모노즈쿠리에 비유했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라멘도(ラーメン道)'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상징하는 가장 큰 변화는 '색깔'입니다. 원래 라멘집의 상징색은 빨간색과 흰색이었습니다. 간판부터 그릇, 요리사의 복장에 이르기까지 그것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기도 하죠. 그런데 최근의 라멘집을 유심히 보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색깔인 검은색과 감청색이 눈에 띕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검은색이나 감청색 티셔츠를 입은 요리사들의 모습은 수행자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죠. 모노즈쿠리와 결합하면서 라멘문화는 훨씬 다채로워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일본 라멘'하면 삿포로의 미소라멘, 도쿄의 쇼유라멘, 하카타의 돈코츠라멘을 꼽고는 하는데요. 이것 말고는 일본에는 약 40여 종에 이르는 '지역 라멘'이 존재하고 라멘 장인 만들어낸 독특한 스타일의 라멘을 좇는 계열도 존재합니다. 국물부터 면, 토핑에 이르기까지 호쾌함과 풍성함이 특징인 '지로계 라멘', 고기 육수와 해물 육수를 섞어 만든 더블(W) 수프가 특징인 '아오바계 라멘', 그리고 면과 육수가 따로 나와 면을 육수에 적셔서 먹는 '다이쇼켄계 라멘', 오늘날에도 일본의 라멘 장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맛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블루라멘, 레몬라멘처 창의적인 시도가 돋보이는 라멘들도 등장했죠. 라멘은 어느새 가장 일본적인 음식이 되었고, 여러 스타일의 라멘을 좇는 것은 대중적인 오락거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라멘은 이렇게 일본의 국민음식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