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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 사랑한다.

by 팔딴 2023. 6. 16.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2018년 50주 연속 베스트셀러라는 진기록을 세웠던 책입니다. 이 책이 그토록 인기를 얻은 이유를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떡볶이의 힘'이라는 겁니다. 참을 수 없이 울적한 순간에도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는 말이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을 샀다는 건데요.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한국인들에게 떡볶이는 일종의 힐링푸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한국인은 왜 떡볶이를 먹으면서 위로받을까요?

 

1. 떡의 민족

가래떡
이미지출처: 유튜브채널 '아이오 IO'

한국인은 아주 오래 전부터 떡을 먹었습니다. 신석기시대에 농사가 시작된 이후 수확한 곡물로 맨 처음 만든 요리는 죽이었고 그 다음이 떡이었죠. 곡물을 갈아 물을 넣고 끓이면 죽이 됐고 시루에 안쳐 찌면 떡이 됐습니다. 4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무덤벽화를 보면 시루로 떡을 찌고 있는 장면을 찾아볼 수 있죠. 한때 떡은 한국인의 주식이었습니다. 부분의 한국인이 밥을 주식으로 삼은 건 가마솥이 대중화된 고려 중기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떡의 역사가 이처럼 오래된 만큼 떡과 관련된 문화도 다양하게 발전했는데요. 대표적인 예가 가래떡입니다. 한국인들은 새해 첫날이면 하얀 가래떡을 먹었습니다. 흰색은 '햇빛', '새로운 시작', '청결함'을 의미했기 때문에요. 가래떡을 먹음으로써 안좋았던 일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려 했던 겁니다. 가래떡을 그냥 먹기도 했지만 얇게 썰어 국을 끓이기도 했는데요. 이 음식을 '병탕'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떡국'이죠 엽전 모양의 떡이 수북이 쌓인 떡국을 먹으면서 재산도 그만큼 불어나길 기원했다고 합니다. 가래떡을 활용한 음식 중에는 오늘날 떡볶이의 먼 조상으로 여겨지는 '병자'라는 음식도 있었는데요. 가래떡을 소고기, 버섯, 채소와 함께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이었습니다. 이 병자에서 꼬챙이는 빼고 재료를 굽는 게 아니라 볶거나 찔 생각을 하는 건 그리 어려운 도약은 아니었을 겁니다. 때문에 19세기에 이르면 가래떡을 소고기, 버섯, 채소와 함께 볶은 뒤 간장을 부어 졸인 음식이 《시의전서》를 비롯한 여러 요리책에 등장하고 있죠. 이 음식을 '떡찜'이라고 했는데요 떡찜은 20세기 초에 이르면 '떡볶이'라는 이름으로 변화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최초의 떡볶이는 바로 이렇게 생겼습니다. 추장이 아니라 간장으로 맛을 냈고 가래떡, 소고기처럼 일상적이지는 않은 재료를 쓴 고급 음식이었죠.

 

2. 고추장 떡볶이

1938년에 나온 노래 '오빠는 풍각쟁이'에는 떡볶이를 혼자만 먹는 오빠를 나무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고♬ 이때까지도 떡볶이는 아무나, 언제나 먹을 수는 없는 음식이었고 때문에 종종 강한 욕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떡볶이가 일상음식이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요? 그건 떡볶이의 주 양념이 간장에서 고추장으로 변화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 했습니다. 1953년 서울 신당동 길거리에는 고추장에 버무린 떡볶이를 파는 한 노점상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이 사람, 그의 이름은 '마복림'이었습니다.

고추장 떡볶이의 시초, 마복림
이미지출처: 유튜브채널 '아이오 IO'

탄생신화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복림은 어느 날 중국집에 갔다가 춘장이 묻은 떡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걸 고추장으로 볶아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죠.그는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소스에 가래떡을 넣어 끓였습니다. '고추장 떡볶이'의 탄생이었습니다.

고추장 떡볶이가 전국적인 음식으로 발돋움한 건 1970년대의 일이었는데요. 1962년부터 1977년까지 이어진 혼분식장려운동이 떡볶이의 초기 확산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베이비붐이 일어 인구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쌀 생산량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식량난 문제가 불거졌죠. 반면 밀가루는 넘쳐났는데요. 미국은 미국대로 잉여농산물이 넘쳐나 문제였기 때문에 밀가루를 원조 형식으로 한국에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밀 소비를 촉진시키는 캠페인을 전개했죠. 그 결과 1970년대가 되면 전국의 학교 앞에는 밀가루 음식을 파는 분식집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떡볶이는 우동, 쫄면, 라면, 만두 등과 함께 분식집의 대표 메뉴로 자리를 잡았죠. 가래떡은 쌀로 만드는데 떡볶이가 왜 분식이 됐던 걸까요? 밀떡과 밀고추장의 등장 덕분이었습니다. 비싼 쌀 대신 값싼 밀로 만든 떡과 고추장이 대량으로 공급되며 떡볶이 제작 단가는 확 낮아졌습니다. 때문에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계층만 먹을 수 있었던 떡볶이는 주머니가 가장 가벼운 학생들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죠.

 

3. 신당동의 유산

즉석떡볶이
이미지출처: 유튜브채널 '아이오 IO'

1970년대 말부터는 고추장 떡볶이도 간식이 아니라 요리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신당동의 마복림은 좌판을 정리하고 가게를 새로 열었는데요. 그러면서 마복림이 파는 떡볶이도 간식보단 한 끼 식사에 보다 가까워졌습니다. 떡 외에 라면사리, 달걀, 어묵, 양배추처럼 다양한 부재료들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주문이 들어오면 냄비에 재료를 담아 손님들이 직접 끓여먹도록 했죠. 이런 스타일의 떡볶이를 '즉석 떡볶이'라고 합니다. 마복림의 즉석 떡볶이는 줄이 길게 늘어설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주위로 마복림의 가게를 모방한 떡볶이집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죠. 오늘날 신당동 떡볶이가 유명해진 이유입니다. 한때 신당동의 떡볶이집들은 떡볶이집 그 이상이었습니다. 매장 한 켠에 뮤직박스를 설치함으로써 음악을 즐기는 문화공간을 지향하기도 했죠. 1990년대 들어 떡볶이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학창시절 분식집에서 혹은 DJ가 틀어주는 음악과 함께 떡볶이를 먹었던 세대는 어느덧 사회생활을 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새로운 활동공간 오피스타운과 주택가에도 떡볶이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죠. 전문적인 오디오 장비가 흔해지고 또 피자나 햄버거 등 대체품들이 늘면서 신당동은 예전만큼 위세를 떨치지는 못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신당동의 후예들은 짜장 떡볶이, 마늘 떡볶이, 곱창 떡볶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떡볶이들을 개발해내고 있죠. 즉석떡볶이 프렌차이즈 '두끼'는 다양한 종류의 떡볶이를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도록 해 한국은 물론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떡볶이를 간식에서 한 끼 식사로 승격시켰던 신당동의 유산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4. 위로 음식

고대부터 지금까지 떡은 '관계의 음식'이었습니다. 한국인의 주식이 밥이 아니라 떡이었을 때 한국인들은 스무 명 정도씩 마을을 이루고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공동의 식량을 지키기 위해 마을을 빙 둘러 '울'을 쌓았고 울 안의 사람들이 떡을 지어 함께 나눠먹었습니다. 그리고 이 '울'이라는 단어로부터 '울타리'와 '우리'가 파생했죠. '우리'라는 말에는 '함께 떡을 먹는 사이'라는 뜻이 녹아 있는 겁니다. 백일잔치나 환갑잔치, 이삿날처럼 무언가를 기념하는 날에는 떡을 해서 돌리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를 확인하는 행위죠. 떡볶이도 마찬가집니다. 점점 매워지는 경향 때문에 떡볶이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음식으로도 각광받고 있지만요. 떡볶이가 우리에게 주는 진짜 힐링은 '함께 했던 기억'에 있습니다. 왕과 양반의 음식에서 길거리의 음식으로 덕분에 학창시절 누구나 한번쯤 떡볶이를 먹어볼 수 있었고 그 기억 속에는 대부분 친구들이 있죠. 함께 깔깔 웃고 고민을 나누던 그 친구들이요. 우리의 마음 어딘가에 잔여물처럼 남아 성인이 되어서도 환기되곤 하는 감정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직 내게 남아있는 희망을 찾아보는 거라고 합니다. 때로는 이 별것 아닌 기억들이 별것 아닌 음식들이 한 뼘 더 살게 하는 힘을 주기도 하죠. 그래서 한국인들은 위로받고 싶을 때면 떡볶이를 먹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