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0년 베이징 조선의 왕 숙종이 죽고 경종이 왕위를 잇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한 사절단이 베이징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사절단을 이끄는 수장은 이이명이었는데요. 그를 아버지로 뒀던 '금수저' 청년 이기지는 '아버지를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청나라 땅을 밟습니다. 서른 살 이기지에게 베이징은 신기하고 낯선 것 투성이었고 그중 최고는 당시 베이징에 들어와 있던 가톨릭 신부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누던 신부들은 그에게 서양떡을 내옵니다. 입에 넣자마자 녹을 정도로 부드럽고 달았다는 이 빵 어떻게 만드는 거냐고 묻자 설탕과 계란, 밀가루로 만든다는 답이 돌아오죠. 오늘날의 스펀지케이크와 비슷한데요. 이 조선인은 정말 케이크를 먹었던 걸까요?
1. 신들의 음식
달콤함은 무엇보다도 당의 맛입니다. 당은 탄수화물의 일종이고 탄수화물은 단백질, 지방과 함께 3대 영양소 중 하나죠. 사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은 어느 것을 이용해도 상관없지만 뇌는 탄수화물인 포도당을 주로 사용해 에너지를 생산하기 때문에 유독 당에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당이 떨어지면 우리는 배고픔을 느끼고 당을 발견하면 즉각 그것을 먹어치워야 한다는 충동을 갖죠. 오래 전의 인류에게 나무에 매달린 과일이나 벌집에 든 꿀은 자연에서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쁨 중 하나였습니다. 이건 인도 파차마디에서 발견된 벽화인데요. 한 손에 바구니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벌집에서 꿀을 채집하는 사람이 있죠. 주변으로는 당황한 벌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닙니다. 꿀은 과일보다도 귀했고 꿀을 구하려면 어느 정도의 위험까지 감수했기 때문에 고대인들에게 꿀은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풍년을 기원하며 '곡식의 신' 데메테르에게 바쳤던 '물로이(mulloi)' '달의 신, 아르테미스'에게 존경심을 드러내며 바쳤던 헤미아르톤(Hemiarton) 고대 로마인들이 생일이 되면 신께 먼저 바친 뒤 친구들과 나눠먹었던 리바(liba) 제각각 모양은 달랐지만 모두 '꿀을 뿌린 단빵'으로 추정되고 있죠. 단빵은 말하자면 '신들의 음식'인 꿀과 '인간의 양식'인 곡물의 결합이었고 신께 소원을 빌고 동료인 인간들과 마음을 나눴던 기원과 축제의 음식이었습니다.
2. 케이크의 탄생
고대인들이 먹었던 단빵은 케이크의 기원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아직 빵과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효모를 사용해 반죽을 부풀린 데다 단맛도 그리 강하지는 않았죠. 빵에서 케이크로의 도약은 '설탕'의 사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데요. 고대 인도인들이 사탕수수를 정제해서 설탕 만드는 기술을 개발한 이후 이 기술은 이웃한 페르시아로 전해졌습니다. 중세 페르시아인들은 장미꽃이나 오렌지꽃 또는 체리나 석류 같은 과일에서 즙을 추출한 뒤 설탕을 넣어 걸쭉한 용액으로 만들어 먹었는데요. 이 음료를 샤르바트(sharbat)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시럽의 조상이 되는 음식이죠. 651년 페르시아가 이슬람 제국에 멸망하면서 샤르바트는 아라비아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들에게 전해졌는데요. 아랍인들은 샤르바트를 '샤라브(sharab)'라고도 불렀습니다. 또 11세기부터 이탈리아인들이 아랍인들과의 교역로를 열면서 설탕과 함께 샤라브가 전해져 각각 '시로포(sciroppo)', '시로(sirop)', '시럽(syrup)'이 됩니다. 때문에 이탈리아의 '판도로(Pandoro)' 독일의 '구겔호프(Gugelhopf)'처럼 (빵에) 설탕가루니 설탕시럽을 뿌리는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죠. 케이크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분기점은 16세기에 발생했습니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각각 카리브 해와 브라질 지역을 식민화했는데요. 이곳에 사탕수수 농장이 건설되면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설탕이 크게 늘었던 겁니다. 부족한 노동력은 서아프리카에서 사들인 흑인 노예로 채웠는데요. 이렇게 아프리카의 노동력, 아메리카의 설탕, 유럽의 돈과 상품이 순환하며 삼각형 모양을 이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삼각무역'이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포르투갈 항해가들은 리스본과 고아, 믈라카, 마카오, 나가사키를 잇는 항로를 스페인 항해가들은 세비야와 아카풀코, 마닐라를 잇는 항로를 정기적으로 항해했습니다. 때문에 배 안에 오랫동안 저장해두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했죠. 설탕가루나 설탕시럽을 뿌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죽 단계에서부터 설탕을 넣으면 그것도 절여질 정도로 많이 넣으면 빵의 보존성이 획기적으로 올라갔는데요. 하지만 이렇게 하면 잡균뿐 아니라 효모까지 죽어버려 반죽이 부풀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효모를 대신해 반죽을 부풀릴 방법이 고민되었을 겁니다. 돌파구는 계란에 있었습니다. 계란 흰자를 오랫동안 젓다 보면 공기가 섞여 들어가 머랭이 되었고 여기에 밀가루와 설탕을 넣고 반죽해 구우면 효모를 넣지 않고도 폭신폭신한 식감을 구현할 수 있었죠. 빵보다는 케이크에 훨씬 가까워진 음식이 등장한 겁니다. '스펀지케이크'였습니다.
3. 스페인 빵
이건 17세기 스페인 출신의 포르투갈 화가 조세파 데 오비도스(Josefa de Obidos)의 그림입니다. 스펀지케이크처럼 보이는 음식이 그릇에 담겨 있는데요. 하지만 조세파가 이 그림을 그렸을 때만 해도 이 음식의 이름은 '스펀지케이크'가 아니었습니다. 팡 데 에스파냐(Pao de Espanha, 포르투갈) 판 디 스파냐(Pan di Spagna, 이탈리아) 팽 데스파뉴(Pain d'Espagne, 프랑스) 판테스파니(Pantespani, 그리스) 나라마다 철자와 발음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스페인 빵'이라는 뜻이었고 모두 스펀지 케이크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죠. 포르투갈인들은 팡 데 에스파냐 말고 '팡 데 카스텔라(Pao de Castela)'라고도 불렀는데요. '카스텔라'라는 말은 스페인의 전신이 되는 왕국인 '카스티야'(Castile)에서 왔다고 여겨집니다. 팡 데 카스텔라 역시 '스페인 빵'이란 뜻이라고 볼 수 있죠. 흥미로운 것은 팡 데 카스텔라의 진로인데요. 16세기에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이 케이크를 보존식량 삼아 항해를 떠났고 서양인 선교사들도 바로 이 루트를 통해 베이징으로 진출했습니다. 때문에 오프닝에서 살펴봤던 조선인 이기지가 1720년 베이징에서 맛봤던 서양떡은 '스페인 빵'이었을 겁니다. 16세기 중반 나가사키의 일본인들도 포르투갈 배에 실린 스페인 빵을 맛봤는데요. 그때까지 꿀이나 엿의 단맛에만 익숙했던 일본인들은 팡 데 카스텔라가 선사하는 강렬한 단맛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렇게 설탕의 맛을 알게 되었지만 일본에서 설탕은 너무 비쌌습니다. 중국 남부나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던 설탕은 모두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독점되어 일본으로 들어왔기 떄문입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1609년 동중국해에 있던 해상왕국 '류큐'를 침공 반식민지로 만든 뒤 이 땅에 사탕수수를 심어 설탕을 직접 생산했죠.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오키나와입니다. 일본인들은 팡 데 카스텔라를 만들 때 안 그래도 부족했던 설탕을 아끼기 위해 쌀로 만든 '물엿'도 넣었는데요. 이는 의도친 않았지만 일본의 풍미를 가미하는 효과를 냈습니다. 또 서양식 오븐이 없었던 일본인들은 '히키가마'라는 독특한 오븐을 만들어 케이크를 구웠습니다. 일본 스타일의 스펀지케이크 '카스테라'가 18세기 일본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4. 변하(지 않)는 것
한편 19세기에 유럽 각국은 케이크를 오늘날의 모습과 유사한 형태로 발전시켰습니다. 빵에 꿀을 바르던 전통이 중세에 이르러 설탕시럽과 설탕가루를 뿌리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앞서 살펴봤는데요. 16세기에 스펀지케이크가 발명된 이후에는 설탕시럽을 케이크에 붓고 재빨리 오븐에 집어넣어 굳히는 기법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면 케이크에 묻혔던 설탕시럽이 마치 얼음처럼 반짝거렸기 때문에 이 작업을 '아이싱'이라고 했죠. 19세기 영국의 제과사들은 더 곱게 정제된 설탕과 계란 흰자를 섞어서 케이크 위에 펴발랐고 이 기법은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의 결혼식 때 처음 사용되었는데요. 때문에 '로열'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외에 버터크림이나 초콜릿 무스를 바른 형태의 아이싱이 등장한 것도 이 스펀지케이크들을 겹겹이 쌓은 '레이어 케이크'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입니다. 크림이나 무스는 케이크에 극강의 부드러움을 선사했을 뿐 아니라 이크를 미적 대상으로 러니까 아름다움을 즐기는 음식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케이크는 빵으로부터 한 걸음 더 달아났죠. 거의 모든 것이 변했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요. 단에 촛불을 놓고 신께 소원을 빌던 전통입니다. 전통은 오늘날 케이크 위에 촛불을 꽂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죠. 우리는 이 촛불 앞에서 소원을 빌고 '훅' 불어서 촛불을 끕니다. 단빵이든 케이크든 여전히 기원과 축제의 음식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