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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히틀러의 무자비한 광기

by 팔딴 2023. 7. 10.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의 저자 잉그리트 폰 욀하펜

1999년 독일 오스나브뤼크 평범한 물리치료사로 살아가던 잉그리트 폰 욀하펜은 어느 날 의문의 전화 한 통을 받습니다. 환자의 전화겠거니 생각하며 수화기를 들었는데 뜻밖에도 수화기 너머에서는 자신을 적십자 직원으로 소개합니다. '왜 적십자 직원이 전화를 걸었지?' 그때 직원은 이렇게 묻습니다. "친부모를 찾고 싶으십니까?" 욀하펜이 열살일 때 그는 자신이 부모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 직후였고 전쟁으로 많은 아이가 고아가 됐기 때문에 자신도 그들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죠. 그런데 근 60년 만에 마주한 진실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책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는 말합니다. "나는 총통께 아이를 바치는 계획의 일부였다.".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다."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약 2500년 전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최선의 남자들은 최선의 여자들과 관계를 갖고 변변찮은 남자들은 변변찮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최선의 남녀에게서 나온 자식들은 양육되어야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그럴 필요가 없다. 어느 한 부류가 다른 부류보다 우월하다는 선민의식 이 생각은 꽤 뿌리가 깊습니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러 '과학'의 외피를 입으면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을 갖기 시작합니다. 가령 영국의 인류학자 프랜시스 골턴은 대대로 판사를 배출한 몇몇 가문을 예로 들어 재능이 유전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했죠. 따라서 재능 있는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교배하고 재능이 뒤떨어지는 사람들의 번식을 억제한다면 인류의 전반적인 유전형질을 '개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1883년 골턴은 이러한 생각에 '우생학(eugenics)'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생학에서 여러 가지의 허점을 봅니다. 저명한 판사의 아들은 농부의 아들보다 판사가 될 가능성이 더 높지만 그건 유전자의 영향 때문이라기보다는 성장환경 때문일 수 있습니다. '너도 나처럼 판사가 될 수 있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사람과 '우리 분수에 판사는 뭘'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를 한계짓는 정도가 다르고 그건 분명 우리가 이뤄내는 성취에도 영향을 미치죠. 따라서 골턴의 주장은 오늘날 충격적인 순진함 정도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많이 달랐습니다. '저명한 영국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 '현대 피임의 창시자' 마리 스톱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우생학의 열성적인 지지자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건 바로 이 사람, '독일 나치당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일 겁니다. 그는 세상을 좋은 피와 나쁜 피로 나눴습니다. '좋은 피'가 찾아내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것이라면 '나쁜 피'는 찾아내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할 더러운 것이었죠. 따라서 1933년 히틀러와 그가 이끄는 나치 당이 권력을 잡은 뒤 가장 먼저 한 일도 불임수술법을 통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적,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실시 그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지 못하도록 통제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쁜 피를 제거하는 행동의 이면에는 좋은 피를 배양하려는 확실한 행동들이 있었는데요. 금발에 푸른 눈, 흰 피부를 가졌다고 상상된 고대 아리아인 나치는 아리아인이 세계의 모든 인종들 중 가장 우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란이나 인도, 동유럽의 아리아인 후손들이 다른 피와 섞여 열등해진 반면 독일인을 비롯한 북유럽 인종은 아리아인의 혈통을 가장 순수하게 간직해왔다고 주장했죠. 나치의 뇌피셜은 다음의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북유럽 인종이라는 이 모종판에서 2억 명의 아리아인을 생산해낼 수 있다면 그때 세상은 다시 아리아인의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1900년 1,000명당 35.91명이었던 평균 출생률은 1932년 14.98명까지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치는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1935년 '레벤스보른'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개시 전국 각지에 출산시설을 운영하며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아리아인 여성들이 비밀을 보장받은 채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또 나치의 친위대 장교들은 적어도 네 명 이상의 자녀를 갖도록 요구받았죠. 아이가 없는 이들은 레벤스보른 출산 시설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입양하거나 적어도 아이들이 살 곳을 찾도록 도울 의무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를 통해 장차 세상을 지배할 새로운 지배 인종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히틀러의 꿈이자 레벤스보른의 목표였죠. 1939년 9월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올렸습니다.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에 따라 장차 재건될 아리아인이 살아가기에 기존의 독일 영토는 너무 좁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나치는 위대함에 걸맞은 위대한 영토를 확보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역사를 창조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으려 했습니다. 좋은 피에 대해 집착할수록 그것은 타인에 대한 탄압으로 나타났던 겁니다. 그 탄압은 여러가지 양상으로 점점 심해졌습니다. 이제 나치는 불임수술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1939년 나치의 전문가들은 정신병원에 가서 누가 '살 가치가 없는지'를 분별했고 그렇게 분별된 8만여 명의 정신질환자들은 가스실 등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나쁜 피'를 가졌다는 이유로 말이죠.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독일인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아리아인의 순수 혈통을 더럽힌다고 여겨졌던 유대인들 또한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로 분별되었던 겁니다. 독일 전역과 새롭게 점령된 영토에 건설된 강제수용소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수감되어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6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쁜 피를 절멸하기 위해 강제수용소가 건설되었던 이 기간 동안 좋은 피를 생산하기 위한 레벤스보른 출산시설도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았죠. 나치 친위대나 독일군에게는 아리아인의 외모를 가진 현지 여성과 혼외관계를 맺어 임신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특히 같은 북유럽 인종에 많이 사는 노르웨이에서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그렇게 태어난 나치의 사생아가 무려 1만 2천 명에 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를 보강하기 위해 어린이 대량 납치도 일어났습니다. 조금이라도 아리아인의 외모에 가까운 아이들이 있다면 나치는 그 즉시 부모로부터 빼앗아 인종검사를 실시했고 이 인종검사에서 통과할 경우 레벤스보른 시설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이 히틀러의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독일인 가정으로 입양되어 독일인으로 자라났죠. 1942년 8월 유고슬라비아의 도시 첼예에 살던 갓 9개월 된 아기 에리카 마트코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에리카 마트코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나가던 잉그리트 폰 욀하펜이 긴 여정의 끝에서 마주한 자신의 옛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그리고 독일의 패배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의 패배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웃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피가 흘렀기 때문입니다. 피에 대한 나치의 광기어린 집착은 누구도 웃음짓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본 영상은 책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를 읽고 제작되었습니다. 나치가 실행한 끔찍한 인종 실험,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의 희생자인 저자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