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김치, 맛있게 먹는 역사이야기

by 팔딴 2023. 7. 3.

여러분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보셨나요? '조선시대에 좀비가 창궐한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좀비물인데요. 대체역사물이라 시대를 특정하는 게 큰 의미는 없지만 작가가 참고했을 법한 시대가 있습니다. 1670년의 경신대기근입니다. 흉년으로 아사자가 속출하고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은 경술년 조선의 풍경이기도 했죠. 그런데요. 이 '배고픔의 시대'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했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 김치를 김치답게 만든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김치의 원래 모습은 이랬습니다.

백김치

1. 절인 채소

모든 음식은 신선할 때 먹어야 가장 맛있습니다. 하지만 냉장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음식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건 무척 어려웠는데요. 때문에 음식의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가장 먼저 도입된 방법은 '음식을 말리는 것'이었습니다. 음식 안에 있던 수분이 다 빠져나가면 세균이 제대로 번식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럴 경우 음식의 식감이 사라져버리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요. 때문에 다른 방법들이 개발되었고 그중 하나는 채소를 소금물이나 식초에 담그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절임'이라고 합니다. 채소절임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 메소포타미아나 인도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각자 나름대로의 채소절임을 만들어 먹었죠. 그중 하나는 유럽의 '피클'인데요. '피클'이라는 단어는 중세 네덜란드어 '페클'에서 왔다고 여겨집니다. 페클은 '소금물'이라는 뜻입니다. 채소를 소금물에 담그면 채소 속보다 소금물의 농도가 크기 때문에 채소에 있던 물이 밖으로 빠져나옵니다. 이것을 '삼투압 현상'이라고 하는데요. 물이 빠져나가면 채소는 아삭한 식감을 갖게 되고 세균들은 죽어 채소의 보존성이 올라가죠. 그런데 염분에 강한 유산균은 살아남아 톡 쏘는 신맛 물질인 젖산을 배출합니다. 그 결과 시고, 짜고, 톡 쏘고, 아삭아삭한 피클이 탄생하죠. 고대 중국인들도 피클과 비슷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경에 편찬된 《시경》을 보면 오이의 껍질을 벗겨 '저'라는 음식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단어를 뜯어보면 '채소(艹)를 물에 담그다(沮)'라는 뜻이 되는데요. 오이를 소금물에 담가 발효시키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저'가 바로 오늘날 김치의 먼 조상으로 여겨지는 음식입니다. '저'가 언제 한반도로 전해졌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기원전 108년 고대의 조선이 한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을 때 한반도는 잠시 중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때, 저가 한반도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죠. 하지만 기록은 없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고구려가 발효음식을 잘 담갔다는 기록은 있어서 고대의 한국인들이 채소절임을 먹었을 개연성은 무척 높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중세 한국인들은 미나리, 죽순, 순무, 부추 등으로 저를 담갔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채소절임을 가리키는 이름은 또 있었는데요. 순우리말 '디히'였습니다. 그리고 이 '디히'의 음을 살려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지'가 나왔습니다. '지'라는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아 묵은지나 장아찌, 단무지에 남아 있죠. 어쩌면 이 '지'에서 '찌개'가 파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채소절임은 너무 시어지면 그냥 먹기가 힘듭니다. 이때 물을 붓고 끓이면 그나마 먹을 만한 맛이 됐는데요. 만약 이것을 '디히개'라고 불렀다면 '디히개'가 '지개'로 변했다가 '지'발음이 강해지며 '찌개'가 되었으리라고 상상해 볼 수 있죠. 찌개의 어원에 대한 가설 중 하납니다. 14세기에는 채소절임을 가리키는 말로 '침채'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는데요. 침채도 저와 마찬가지로 '물에 담근 채소'라는 뜻이었습니다.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 바로 그 상태를 표현한 거죠 학자들은 이 '침채'라는 단어가 시간이 흐르면서 '딤채'가 되었고 '짐채', '김채'를 거쳐 '김치'로 정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김치는 이름부터 그냥 '채소절임'이라는 뜻인 겁니다. 김치는 본질적으로 중국이나 일본 멀리는 유럽에서 먹었던 채소절임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7세기까지도 말이죠.

 

2. 빨간 맛

이 평범했던 채소절임이 한국 특색의 음식으로 재탄생한 계기는 빨간 고춧가루의 추가였습니다. 중남미가 원산지인 고추는 어떻게, 그리고 왜 김치에 들어가게 된 걸까요? 1492년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항해를 떠난 콜럼버스 그는 우연찮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이곳에 자라던 고추를 유럽에 소개했습니다. 그로부터 몇년 뒤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했죠. 이 두 개의 발견은 고추가 한반도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00년 포르투갈의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은 다 가마가 개척한 항로를 따라가다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오늘날 브라질 지역으로 표류했는데요. 이곳에서 다시 항해를 시작해 인도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는 남미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510년 포르투갈은 인도 고아에 식민지를 건설한 데 이어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를 점령했고 1513년에는 마카오에 무역 거점을 건설 중국과 교역했습니다. 1543년에는 더 북쪽으로 올라가 일본의 나가사키에 이르렀죠. 바로 이 루트를 통해 고추는 중남미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나가사키와 부산을 왕래하던 상인들 혹은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던 사신들에 의해 고추는 16세기 중반 이후 어느 시점에 한반도로 유입되었죠. 한국인이 처음부터 고추와 사랑에 빠졌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독초라고 여겨 경계하는 시선이 많았는데요. 상황이 바뀐 건 17세기의 소빙기 때문이었습니다. 17세기는 지구의 평균기온이 1℃ 정도 떨어졌던 이상한 시대였습니다. 태양의 흑점이 소멸했기 때문이라는둥 설명들은 여럿 있지만 그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죠. 흉작과 기근이 도미노처럼 전 세계를 덮쳤고 여러 가지 사회문제와 갈등, 전쟁이 벌어졌던 시대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중 가장 심했던 것이 1670년의 경신대기근이었는데요. 이상기후 때문에 한반도 전역의 농사가 망하며 아사자가 속출 드라마 〈킹덤〉처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마저 일어났죠.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 1627년과 1636년에 청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던 조선은 17세기 중후반에는 연이은 기근까지 얻어맞으며 인구가 큰 폭으로 감소한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조선 정부는 '나라답지 못한 나라'를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전국 각지의 수리시설을 확충하며 대중화했던 '이앙법'이었습니다. 이앙법은 벼를 다른 곳에다가 먼저 키운 뒤 어느 정도 자라면 논에다 옮겨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 처음부터 벼를 논에서 키울 때보다 잡초가 덜 자랐기 때문에 적은 노동력을 투입하고도 벼농사를 짓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벼농사의 생산성이 올라가면서 18세기 조선의 쌀 생산량은 급증했고 한국인의 밥상은 쌀밥 중심으로 변했습니다. 한국인들은 고된 농사일을 견디기 위해 어마어마하게 많은 밥을 먹었는데요. 하지만 식사량에 걸맞는 반찬을 구비했다간 집안이 거덜났을 겁니다. 적은 반찬으로 많은 밥을 먹는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 그걸 가능하게 만든 게 '짠 반찬'이었습니다. 간고등어, 굴비, 새우젓, 그리고 김치처럼 소금에 절인 음식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죠. 이렇게 소금 수요가 갑작스럽게 늘면서 소금값이 폭등하자 대체재로서 고추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나타났는데요. 고추의 매운맛은 소금의 짠맛만큼이나 자극적이어서 똑같이 밥맛을 돋웠을 뿐 아니라 소금처럼 미생물의 발육을 억제하는 기능도 했습니다. 때문에 고추를 넣으면 비싼 소금을 덜 넣어도 됐죠. 채소를 소금에 절인 음식이었던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게 된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통고추가 들어갔지만 차차 고춧가루가 이용되면서 이 평범했던 채소절임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3. 채소절임의 왕

고추가 추가됨으로써 김치에 더해진 건 '빨간색'과 '매운맛'만은 아니었습니다. 젓갈의 '감칠맛'도 있었죠. 젓갈이 김치의 부재료로 사용된 역사는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하지만 젓갈이 상하면 김치 맛까지 버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일반화되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살균효과가 뛰어난 고추가 들어가면서 비로소 젓갈도 마음놓고 쓸 수 있게 되었죠. 채소절임이면서도 동물성 재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덕분에 김치는 다른 채소절임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진한 감칠맛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김치의 개성이 되었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중국 산둥에서 들어온 배추가 비로소 김치의 주재료로 이용되기 시작했는데요. 1882년 조선과 청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에 집단으로 거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김치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기존에 한반도에서 재배되던 배추는 길쭉한 데다 상추처럼 겉잎이 많아 푸른색을 띠었는데요. 반면 중국에서 들어온 배추는 기존보다 두 배는 컸고 하얀 속잎이 빼곡하게 차 있어 실했습니다. 때문에 점점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배추가 되었죠. 이 배추는 잎이 넓고 안으로 굽어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료를 담을 수 있었고 고춧가루가 열어젖힌 다양한 부재료의 가능성 그 가능성을 넉넉한 품으로 받아들이며 대표적인 김치 형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모습의 배추김치가 탄생한 게 이제 겨우 100년 정도가 된 겁니다. 김치는 보다 복잡한 음식입니다. 기원을 따지면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 절임문화와 만나고 '채소를 소금에 절인다'는 핵심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죠. 물론 이런 채소절임은 전 세계에 아주 흔합니다. 김치는 여기서 딱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고춧가루, 그리고 젓갈로 대표되는 동물성 재료의 추가 새우젓은 물론이고 굴, 낙지, 전복과 소라를 넣기도 합니다. 이 한 걸음 더 나아간 덕분에 김치는 다른 채소절임에선 맛볼 수 없는 풍성함을 갖게 됐죠. 서로 다른 재료들의 서로 다른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녹아든 음식 김치는 이렇게 한국 특색의 채소절임이 되었고 '채소절임의 왕'이 되었습니다.